英國을 세계국가로 끌어올린 '풍운아' 크롬웰, 군사독재로 사후 '부관참시' 왕정 복귀 불러

영국 국회 의사당에 서 있는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동상. 위키피디아

‘영·네덜란드 전쟁 (1652~1674년)’ 당시 네덜란드 배들은 도버 해협을 지나든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북단을 우회해야만 했다. 어느 쪽이든 영국 해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코스였다. 영국은 네덜란드 해로를 압박하는 위치에 있었고, 바람 또한 영국에서 네덜란드 쪽으로 불어 영국에 유리했다. 따라서 영국군은 네덜란드의 해로를 수월하게 차단할 수 있었고, 유사시 빠르게 출항해 전투 대열을 구축할 수 있었다. 영국해협의 해상안보를 위해 키운 영국해군은 육중한 대포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영국은 잘 무장된 대형 군함을 투입하여, 네덜란드 해군을 압박했다. 네덜란드는 1652년 제1차 영,네덜란드 전쟁 당시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네덜란드 전함의 주된 역할은 큰 함정들과 전투를 벌이는 게 아니라, 상선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출처, 《해전의 모든 것》, 이에인 딕키 등 역저/한창호 번역, 휴먼앤북스, 2010.5).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네덜란드의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네덜란드에서 만든 대형 군함은 네덜란드의 주요수출 상품이었다. 네덜란드는 그러나 대형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소형함선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가 대형함선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했고, 항로 보호를 위해서는 다수의 소형함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편리하다는 이유가 있었다. 네덜란드의 해안은 수심이 얕기 때문에 대형함선을 운용하기 어려운 지형적 사정도 있었다. 영국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특산물을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기 시작했다. 영국해협의 제해권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1649년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이 ‘영국의 근해는 영국의 영해다’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항해조례(1651)를 발표하고, 영국 근해에서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임검수사권(臨檢搜査權)’을 요구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제1차 전쟁(1652∼1654년)이 발발했다. 1652년 5월 제네바에서 네덜란드로 귀환하던 상선 3척을 호위하던 네덜란드 함선에게 영국의 프레지던트 호가 와이트 섬 근처에서 예를 갖추라고 강요하였다. 네덜란드 함선들이 이를 거절하자 영국함선이 함포사격을 하였고, 결국 네덜란드 함선들은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2년 5월 18일에는 네덜란드의 마르텐 트롬프(1597~1653년)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호위 아래 네덜란드 상선 43척이 영불해협을 항해하였다. 5월 19일 영국의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1598~1657년)이 트롬프 제독에게 예를 표할 것을 강요하며 함포사격을 가함으로써 제1차 영·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였다. 블레이크 제독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 못지않은 명장이며, 영국 왕립해군 설립자이기도 하다. 1653년 헤이그 근해에서 벌어진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트롬프 제독이 전사한다. 브레이크 제독을 이은 조지 뭉크 제독이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은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제1차 영·네덜란드 전쟁은 1654년 양국간 조약을 통해 종결됐다. 크롬웰은 제1차 영·네덜란드 전쟁 종전 당시 네덜란드 요한 드 비트 총리에게 “오라녜 가문이 ‘슈타트홀더’(Stadtholder, 군주제 또는 영국의 호국경과 유사한 권력의 네덜란드 총독) 자리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제안했다. 평소 오라녜 가문을 탐탁찮게 여기던 요한 드 비트는 이 제안을 얼른 받아들였다. 크롬웰의 숨은 책략은 네덜란드 국론을 분열시켜서 영국과 경쟁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요한 드 비트는 외세를 이용한 내치 강화라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요한 드 비트는 이 때문에 나중에 숙청당한다. 영·네덜란드 간 해전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차 전쟁이 주로 네덜란드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네덜란드의 대응이었다면 2차 전쟁은 영국 크롬웰이 죽은 뒤 제해권 경쟁을 위한 전투함대간의 전쟁이었으며, 3차 전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한 네덜란드 해군의 대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올리버 크롬웰 이전의 항해조례는 특권적 무역회사를 지주로 하는 수출무역체제의 유지·강화를 목적으로 해운 강화와 보호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는 근세 산업자본주의와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① 중개무역국가인 네덜란드의 패권을 타도하고, ② 영국의 해운조선업·무역업의 보호육성을 추구한 것이었다. 예일대 석좌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는 역저 <근대세계체제>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는 핵심국가 간 치열한 투쟁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평했다. 1651년 항해 조례는 올리버 크롬웰이 실권을 잡고 있던 잉글랜드 공화국 정부가 공포한 조례로서 네덜란드 상인에 의한 중계 무역을 제거하는 데 목적을 둠으로써 영·네덜란드 전쟁을 불러왔지만 동시에 영국의 상업혁명 및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중계무역대국인 네덜란드는 세 차례 전쟁에서 영국에 패했고, 이후 세계 향신료무역과 중계무역에서 영국에 우위를 넘겨주게 됐다. 네덜란드는 미주대륙과 동남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도 크게 상실했다. 이런 식으로 영국은 힘을 바탕으로 한 해양책략으로 큰 부를 축적했지만 영국과 미국 간 1773년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을 계기로 식민지 미국의 독립 투쟁을 맞이 하게 된다. 영국의 중상주의를 위해 제정된 항해법은 19세기 중엽 영국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시장을 완전히 제패하고 난 후부터는 오히려 영국의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규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폐지된다. 항해법은 부르주아들이 원하던 자유주의를 방해했고, 이미 시대에 뒤쳐진 법률이었다. 항해 조례는 1849년 자유당의 존 러셀 수상(20세기 최고지성이라 일컫는 버트런드 러셀의 할아버지)에 의해 폐지된다. 이로써 외국상선의 영해 입항이 자유로워졌다. 21세기인 요즘도 올리버 크롬웰의 배타적인 항해조례의 정신을 고수하는, 아니 더 강화한 유일한 국가가 있는데, 자유시장경제의 대표 격인 미국이다. 미국 의회는 1920년 해운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상선법》을 제정하였다. 한 국가 내 두 항구 사이를 오가는 선적물을 '카보타지'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는 특정 국가 내 2개 지점 간 운송은 해당 국가의 소유 하에 있으며 해당 국가에 등록된 항공기, 선박 등에 한정하여 허용되고 있다. 육상·해상·항공운송에 공히 적용되나, 특히 해상운송 및 항공운송 분야에서는 엄격히 적용되며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미국의 《상선법》은 ‘카보타지 선박은 미국 내에서 건조돼야 하고, 미국 시민권자가 배 소유권의 75% 이상을 가져야 하며, 배를 운항하는 선원도 모두 미국인이어야 한다'는 강제조항을 추가하고 있어 현재도 무역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다. 중국에는 '중국에서 건조된 중국선박으로 중국화물을 수출한다'는 《국수국조 (國輸國造)정책》의 원칙이 있는데, 그 효시는 17세기 영국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이 이를 강화했으며 지금은 중국이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상선법은 근래 들어 오히려 미국 경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국제통화기금 수석부총재를 지낸 존스홉킨스대 앤 크루거 교수는 “존스법은 오랫동안 미국 해운업을 파괴했고, 미국 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환경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으며 이제는 다른 것을 시도할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출처, 《WEEKLY BIZ 》, ‘99년간 미국 상선산업을 파괴한 보호주의 존스법', 앤 크루거 존스홉킨스대 교수, 2019. 4. 26.).

텍셀 해전(1673년). 위키피디아

앤 크루거 교수는 이 법의 구체적 피해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즉 미국에서 컨테이너선을 만들려면 1억 9000만~2억 5000만 달러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만들 경우 약 3000만 달러면 충분하다. 상선법을 준수해 만들어진 배가 너무 비싸다 보니 경제적으로 유용하게 쓰이는 기준이 약 20년인데, 성선법에 따라 건조된 배의 65% 이상이 30년 이상 운항에 투입되고 있다. 미국 선박의 하루 운영비용은 외국 선박의 3배에 가까우며 미국 승무원 임금은 국제평균에 비해 약 5배 높다고 한다. 미국 해안과 오대호의 선적 비용이 워낙 높다 보니 1960년 이후 바다를 통해 운송되는 미국 상품의 양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출처,《WEEKLY BIZ》,상동).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강제 병합하고 '호국경'에 등극했지만 국내 사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의 군사독재 때문이다. 크롬웰의 정치는 근본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엄격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나마 자유롭던 왕정 시대를 그리워하게 됐다. 크롬웰은 내심 왕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지만 군대가 반발했다. 결국 크롬웰이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다는 정도로 타협됐다. 크롬웰은 죽기 직전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임 호국경으로 지명했다. 아들 크롬웰은 아버지 크롬웰만큼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말년에는 채무에 쫓겨 파리와 제네바 로 이주하기도 했다. 크롬웰 사후 왕정으로의 복귀가 이뤄졌는데, 주역은 조지 멍크(1608~1670)다. 멍크는 청교도 혁명 당시 크롬웰의 상대편인 왕당파를 지휘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크롬웰 휘하의 장군이 됐다. 그 후 멍크 제독은 영·네덜란드 해전에서 함대사령관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스코틀란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크롬웰 사후 멍크는 《통치장전》을 쓴 주역이자 스스로를 올리버 크롬웰의 후계라고 오판한 존 램버트(1619~1684년)가 의회를 장악하자 찰스 2세와 손을 잡고 왕정으로 복고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멍크 제독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영국의 공화제는 불과 6년여 만에 끝났고, 찰스 2세가 즉위하게 된다. 왕정복고 후에는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부관참시가 시행됐다고 한다.

크롬웰의 저주일까? 역사의 가정이지만 올리버 크롬웰이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제를 만들고, 그 체제에 의해 영특한 후계자를 선출했다면 미국보다 앞선 민주국가가 영국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재산도 권력도 3대 가기가 어려운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 과유불급의 철칙이 작동하는 까닭이다. 1640년부터 1660년까지 20년 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청교도 혁명’은 역사가들의 고민거리다. 한쪽에서 보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진 시민혁명이며, 근대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나라들이 이미 경험하고 넘어갔던 종교전쟁의 끝내기였다. 청교도혁명은 영국 청교도들의 미국으로의 대 이주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추가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후 영국의 청교도와 영국성공회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620년 청교도인 '순례의 조상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북아메리카)의 플리머스로 떠났다. 66일간의 어려운 항해를 거쳐, 케이프코드의 프로빈스 타운에 닻을 내렸다. 이들은 영국에서 두 번째 대규모로 미국 신대륙을 밟은 이민단이었다. 미국 최초의 영국 이주민은 메이플라워호보다 13년 먼저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버지니아 이민자들이 신대륙 경영의 기반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인들은 이들을 진정한 선조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빈민, 부랑아, 전과자 등 선조로 내세우기는 좀 부끄러운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다. 더구나 이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온 목적은 오로지 돈벌이였을 뿐이며 ‘개척, 자유, 모험’ 등 오늘날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출처,《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유종선, 가람기획, 2012.10).

그래서 미국인들이 오늘날 그들의 선조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들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건너온 일단의 청교도들인 '순례의 조상들'이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기 전에 그 배에서 소위 메이플라워 서약을 체결하여,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시민정치체제를 만들고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에 복종한다는 것을 서약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의회의 설치와 자치체의 형성은 그 뒤에 건설된 다른 식민지에도 도입되었다(위키백과, 메이플라워호). ‘메이플라워 서약’은 다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정부의 설립을 결정한 것으로서, 미국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짧지만 진한 흔적을 남긴 풍운아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크게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내전 이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데 기여했으며, 《통치장전》을 제정하여 입헌주의 정치의 발전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시민혁명의 가치를 훼손한 군사독재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어쨌든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중상층(젠트리) 출신인 올리버 크롬웰이 제해권을 가졌던 네덜란드에게 치명타를 날리면서 훗날 영국이 해상제국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현대 영국인들이 뽑은 영국 역사상의 위인 중에서도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정치적 위치와 행적 때문에 해군의 함선에 이름이 붙지는 못했다. 사실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든 간에 영국 왕실 입장에서 볼 때 크롬웰은 어쩔 수 없는 '반역자'이다. 따라서 엄연히 왕립 해군인 영국 해군의 함선에 '반역자'의 이름을 붙이기란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공화제가 아닌 군주제를 채택하는 한 올리버 크롬웰의 평가는 계속 후세의 몫이 될 것 같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