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 대통령과 알프레드 마한의 해양책략 I ­최강 해양대통령의 등장

미국 러시모어 산의 미국 초대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4인 두상(왼쪽부터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사진 위키피디아)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 배우자, 스승, 친구, 상사와 부하 등으로 만났는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기도 한다. 좋은 만남은 서로 이해하고 긍정해주며, 서로 발전하고 상승하며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만남이다. 나쁜 만남은 부정하고 의심하고 퇴보하며, 서로 부서지는 만남이다.

역사도 만남의 연속이다. 어느 위대한 인물도 역사 속에 홀로 서 있지 않다. 독일의 역사작가인 헬게 헤세는 “역사적 인물들의 만남이라는 연결고리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만남은 퍼즐 조각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리키는 작은 그림이자 역사의 큰 그림을 구성하곤 했다”고 묘사했다. 지중해를 넘어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제자 알렉산더 대왕, 팍스 브리태니카를 건설한 빅토리아 여왕과 벤저민 디스레일리 수상, 실크로드를 개척한 몽골황제 쿠빌라이 칸과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 수에즈운하를 건설한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와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파샤 등 역사적 만남의 사례는 무수하다.

신대륙의 미국은 19세기 말까지는 강력한 해군을 갖추지 못했다. 1890년경 미국 정부가 ‘이제 미국 내 개척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고 공표했을 때, 1776년 독립 이후 한 세기 동안 서부개척을 동력으로 발전해온 미국인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새로운 개척의 대상으로 해양개발을 모색하게 되었다. 때맞춰 등장한 인물이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미국 제26대 대통령 재임 1901~1909년 재임, 본고에서는 당시 언론의 표기대로 ‘TR’로 표기)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이다. TR과 알프레드 마한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세계 해양 판도를 바꾼 최강의 해양대통령과 역대 최고 해양책사의 관계였다.

미국 제26대 대통령 TR은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연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되는 동시에 탐욕적 제국주의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1901년 전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재임 1897~1901년)이 돌연 암살당하자 부통령이던 TR은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 들어섰던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이 망해 가고, 미국은 강국으로 커가는 시점이다.

TR은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자, 42세 때 취임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다. 젊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존 F. 케네디는 대통령에 취임한 때 43세로 둘째로 젊다. 단 케네디는 '선거로 뽑힌' 최연소 대통령이다. TR은 전임자 승계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된 대통령(재임 1901~1909년)이다. TR의 미국 땅 시조는 1650년경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으로 이민 온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다. 미국에는 두 명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있는데, 바로 TR과 FDR이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1882~1945)는 미국의 32번째 대통령(재임 1933~1945년)으로 이니셜 표기는 FDR이다. 24세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12촌으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친척 형제이다.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의 아들 니컬러스 루스벨트가 TR과 FDR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의 아들 니컬러스 루스벨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큰 아들 요하네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 베이 루스벨트가(민주당지지), 둘째 아들 야코부스 루스벨트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가(공화당지지)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두 가문은 각각 대통령을 배출했다. TR은 공화당원인 요하네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며, FDR은 민주당원인 야코부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다. FDR은 모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TR의 질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훗날 엘리너는 FDR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었다.

TR과 FDR은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들이 있다. 루스벨트 혈통의 친척 형제라는 점, 둘 다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한 점, 명문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점, 뉴욕 주 주지사를 역임하고 개혁적 정책을 추진한 점, 공직 초기에 둘 다 국방성 해군담당 차관을 역임하고 해군을 중시한 점 등이다. FDR은 뉴딜 정책으로 유명하다. 뉴딜은 TR의 ‘스퀘어 딜(Square Deal, 공정한 대우정책)’과 윌슨 대통령의 ‘뉴 프리덤(New Freedom, 새로운 자유정책)’의 합성어이다. 뉴딜의 뿌리를 찾아보면 TR의 스퀘어 딜을 만나게 된다. 미국의 20세기 국가 설계는 TR과 FDR 두 대통령에 의해 구상됐다고 봐야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왕성한 산업화를 거치게 된다. 1900년 공업 총생산액에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액수를 넘어서게 된다. 영국 대신 ‘세계의 공장’이 된 것이다. 당시 세계 공산품의 약 절반은 미국제였으며, 면화 철 석유 등 중요 1차 생산물 생산량 역시 세계 생산량의 30%에 달했다. 당시의 유럽이 `세기말’의 쇠퇴와 불안을 이야기하는 동안 미국은 20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출처, 인물세계사, 함규진).

이때 미국은 경제적 배분에 관한 무대책으로 빈부격차가 더욱 커지고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TR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경제적 악폐와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젊고 야망이 넘치는 40대 초반의 TR은 때로는 집권당인 공화당과도 대립하면서 진보적인 개혁과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대통령이 ‘국민의 신하’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는 한 공공선의 창출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출했다. TR은 《공정한 대우 Square Deal》로 명명된 신경제정책을 발표하면서 연방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선포하였다. 이 정책은 ‘3C정책’으로 불리는데, 천연 자원 보존(conservation of natural resources), 기업규제(control of corporations), 소비자 보호(consumer protection) 등이 주요 목표였다.

공정한 대우정책은 독점 규제, 중소기업 보호, 노동자·농민의 권익 신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석유왕 존 록펠러를 비롯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등 소수 거대 자본가들에 대해 TR은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합병을 규제했기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편으로 노동조합의 폭력적인 파업에 대해서도 엄격한 처벌, 단속을 천명하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TR의 ‘공정한 대우정책’은 공익과 사회 안정을 위해 정부가 노사분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과 동시에 기업 활동과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확립했다. '스퀘어 딜'은 국가가 경제 활동의 자유와 효율성 못지않게 경제 분배의 정의를 중요한 가치로 추구해야 한다는 미국 자본주의의 진보적 이상을 대변한 것이고, 미국식 수정자본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출처, 유종선,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2).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택지 확보 방안의 하나로 그린벨트 해제여부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미국의 조류학자인 존 제임스 오듀본과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의 영향을 받은 TR은 ‘자연주의자 대통령’으로서 환경보존에 앞장 섰으며 대규모 치수관개사업도 추진했다. TR은 대통령 임기 중 후손을 위해 약 2억 3000만 에이커 이상의 숲을 야생보존 국유림으로 특별히 설정하였고, 국립공원은 2배로 늘렸으며 16개의 국립명소, 51개의 야생동물서식지를 지정했다.

어릴 때 몸이 약했던 TR은 간질과 발작, 폐렴, 천식 등 잔병치레가 심하였지만, 평생 운동을 통하여 강인한 체력을 길렀고 평생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책을 통해 세상의 신기함을 최대한 접하려고 했으며, 특히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서 한 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가정에서 어학, 수학 등에 관해 영재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하버드대 입학 시 TR에게 “첫째 도덕, 둘째 건강, 셋째 학업”에 힘쓰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얼마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났지만, TR은 평생 중요한 결단의 시기 때마다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를 유념했다고 한다. 자식의 가장 큰 효도는 아버지에게 지혜를 빌리는 것이라는 금언대로라면 TR은 효자였다.

TR은 1880년 하버드 대학에서 매그너 쿰 라우데로 우등 졸업했고, 우등생 클럽인 파이 베타 카파에 들어갔다.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곧 법률 공부보다는 역사와 정치에 매료되어 도중에 중퇴했다. 1882년 약관의 나이인 24세에 뉴욕 주 하원 의원이 된 뒤 이내 공화당의 중견 정치인으로 부각되었고 파벌정치에 저항하고 소신 있는 행동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37세인 1895년 당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에 의해 공화당원임에도 뉴욕 주 경찰청장에 임명되었으며, 정치인의 부패를 적발하고 성역없이 처벌해 명성을 얻었다.

TR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저술한 책은 38권에 이른다.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다.

TR은 부친과 함께 한 어린 시절 세계 일주 경험을 통해 바다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된다. 대학생 시절부터 해양력과 해군에 관심이 컸고, 졸업 직후인 1882년 ‘대양에 국가 미래가 달려 있다’는 내용의 책인 《1812년의 해전(The Naval War 1812)》을 저술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해군에서 고전으로 읽혔다. 1890년에 나온 알프레드 마한의 《해군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도 깊이 공감했던 그는 미국이 해양세력으로 거듭나야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경제력에 비해 형편없던 해군력을 개탄했다.

1895년 선거에서 제2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정부 초기 TR은 해군 차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이 만일 TR의 해양력에 대한 야심을 알고 있었다면 임명을 보류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견해다(출처. 더글러스 브린스클리,《The Wilderness Warrior》, Harper Collins Publishers, 2009).

사실 그는 대통령이나 장관들보다 더 큰 국가 비전과 해양책략의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군담당 차관이 되자마자 질적으로 최상 수준의 12척의 전함, 6척의 순양함, 75척의 어뢰정 건조계획을 수립하고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았다.

이어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담당 차관 직을 사임하고 ‘러프라이더(Rough Rider)’라는 별명을 가진 민병 기병대를 조직하여 쿠바로 건너가 공적을 세우고 전쟁영웅이 되었다. 전쟁에서 영웅 난다는 말이 있지만, 미국 대통령들 중 전쟁에 참여하여 영웅훈장을 달고 대통령이 된 사례가 많다. 상류층 인사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전쟁터에 아들과 함께 출전했는데, 그의 아들은 전사했다. 이는 당시 정치에 불신이 깊던 미국 국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TR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됐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인맥과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들, 부패한 공직자들, 무능력한 공직자 등을 해임하고 법인세와 공무원 채용 제도를 대폭 개혁하였다.

하지만 공화당의 당론을 자주 벗어나는 TR의 처신에 불만을 가진 공화당 간부들은 음모를 기획했다. 바로 1900년의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윌리엄 매킨리의 러닝메이트로 TR을 추켜세운 것이었다. 190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매킨리는 TR의 무훈과 명망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의 부통령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인기 없는 직책이었다. 실권이 거의 없는 명예직이면서도 정치경력의 최종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부통령이란 자리는 대통령 죽기만을 기다리는 자리라고 하지 않던가. 더욱이 맥킨리 대통령의 소심한 외교정책과 점진적 팽창주의는 TR의 대담한 외교정책과 적극적 팽창주의와 코드가 맞지 않았다. TR은 하와이 병합, 남아메리카에 대서양-태평양을 잇는 운하 건설, 비행기 개발 등의 과감한 주장을 거듭해 매킨리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 등을 골치 아프게 했다.

TR은 “임기가 끝난 뒤에는 대학 강사 자리나 알아봐야겠다”고 푸념했으나,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 벌어진다. 1901년 9월 14일,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된 것이다. 부통령 후보가 된 것부터 대통령 승계까지 천시가 TR을 도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최강의 해양대통령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 지점에서 크게 회오리치며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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