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제7광구 해양책략

석유개발을 위한 한-일 대륙봉협정문안작성을 위한 기초실무자회의가 1973년 6월 27일 외무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연합
최근 일본의 총리가 아베 신조에서 스가 요시히데로 바뀌었다. 스가 신임총리는 일본 최장수 총리를 기록한 아베 총리의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총리 임기가 2021년 9월까지로 한시적이지만, 우리로서는 경색될 대로 경색된 한·일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한일관계 현안은 징용문제, 외교안보 협력, 코로나 19 공조, 단절된 인적 교류 복원, 일본의 수출규제 해소,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주변해역 수산물 수출문제 등이다. 모두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이지만, 7광구 문제는 수면 아래 웅크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안의 하나이다.

1961년 5월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6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한일협정을 조인하였다. 이 협정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모두 8억 달러를 확보하였다. 1964년 한국의 전체 수출액이 약 1억 2000만 달러였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한일협정에서 한일어업협정은 핵심쟁점이었고 가장 힘든 협상과정을 거쳤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평화선은 12해리 어업전관수역 축소로 무력화되었으며, 특히 독도를 둘러싼 여러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야당과 대학생들은 박정희 정부의 대일외교를 ‘굴욕외교’라고 비난하면서 크게 반발하였다.

돌이켜보면 한일외교정상화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훗날 “한일협정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한국경제의 도약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외교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평가”(출처, 남성욱 외 지음, 《한국의 외교안보와 통일외교》,p.132, 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11)가 따랐지만, 평화선을 지켜내지 못한 역사적 인물로 박정희 대통령이 기록된다.

1970년대는 국제적으로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닉슨독트린에 의한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정책과 미군 철수, 미국과 중국 수교, 중동전쟁과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세계적인 불황·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적자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국내적으로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와 유신체제 출범이 있었다.

‘자주 국방’, ‘자립 경제’라는 국정목표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1973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산업화의 동력인 석유자원의 확보는 핵심 사안의 하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바다에서 잃은 국민적 실망과 정치적 내상을 바꾸려는 반전의 기회를 바다에서 찾으려 했다. 평화선 포기로 어업에서 큰 타격을 입은 해양에서 대륙붕 유전개발이라는 회심의 책략을 도모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산유국을 부러워만 했던 한국 국민에게 대륙붕 유전개발 책략은 당시 상상도 못했던 산유국의 꿈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1970년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의 산유국 꿈은 한 세대가 지난 1998년 국내 최초로 울산·포항지구 해역에서 가스 유전 탐사에 성공하고, 2004년부터 상업생산을 통해 세계 95번째 산유국 대열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뤄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륙붕개발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쪽에 대륙붕이 발달한 과학적 사실, 육지 자연연장설을 강조한 1958년 제1차 유엔해양법협약의 대륙붕협약 채택, 그리고 국제사법재판소의 ‘1969년 북해대륙붕 경계획정사건’ 판례.

둘째, 1960년대부터 과학기술의 개발로 세계 해양유전개발 본격화.

셋째, 유엔 산하 극동경제위원회(ECAFE, 오늘날 ESCAP)의 K.O.에머리 박사팀의 동중국해에 세계적 유전매장량 가능성 탐사보고서 발표.

먼저 첫 번째 동기는 1958년 유엔해양법회의가 채택한 4개 협약(영해 및 접속수역, 공해, 어업 및 공해생물자원, 대륙붕)의 하나인 ‘대륙붕협약’이다.

대륙붕은 해안에서부터 약 수심 200m 깊이까지 대륙이 연장된 경사가 매우 완만한 지역으로 빙하 시대에는 육지였던 곳이다. 전 세계 대륙붕 해역의 면적은 전 해양의 약 8%를 차지하고 평균수심은 약 128m다. 대륙붕은 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큰 곳이다. 얕은 바다이기 때문에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각종 광물자원도 많다. 바다의 유전은 대부분 대륙붕에 위치한다. 세계 도처에서 석유ㆍ가스전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32% 정도가 대륙붕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대륙붕 자원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다. 1945년 9월 28일 미국의 제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재임 1945~1953년)의 대륙붕 선언 및 어업 관할 선언이 있고 난 뒤 대륙붕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들이 속출했다. 각국은 자원보존, 영해확장 목적 외에 어장관리를 위해 어업 규제를 하고 관련 입법과 조약을 통해 스스로의 영유권을 선포했다.

우리나라도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 선포와 함께 ‘어업자원보호법’과 함께 평화선을 선포한 것이 첫 번째이고, 박정희 대통령이 대륙붕에 관한 주권 선언과 1970년 1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공표하고, 총 30만㎢ 면적의 7개 해저 광구를 설정한 것이 두 번째이다.

1958년 대륙붕협약 제1조는 대륙붕을 “연안에 인접한 영해 외측 해저구역의 수심 200m까지의 해상 및 그 지하, 또는 수심이 200m 이상인 경우는 그 해저구역의 천연자원 개발이 가능한 곳까지의 해상 및 그 지하, 그리고 섬의 연안에 인접한 동일한 해상 및 그 지하”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육지와의 연접성, 수심기준과 그 제한성, 개발가능성을 중시했다.

협약 10년 후인 ‘1969년 북해대륙붕 경계획정사건’에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대륙붕을 “육지영토의 자연적 연장이며, 어느 국가의 대륙붕이건 그것은 육지영토의 자연적 연장이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배타적 경제수역 EEZ’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대륙붕의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가열되었다. 바다헌장으로 불리는 1982년 제3차 유엔해양법협약은 대륙붕의 개념을 지질학적으로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륙붕경계획정에 관한 최초의 국제법 원칙은 1958년 대륙붕협약에서 규정한 대륙붕 자연연장설과 중간선원칙 및 등거리선 원칙이었다.

그러나 1969년 북해대륙붕 경계획정사건 이후 ‘1977년 영·불 대륙붕 경계획정사건’과 ‘1982년 리비아·튀니지 대륙붕 경계획정사건’에선 형평의 원칙을 강조했고, 1982년에 타결된 제3차 유엔해양법협약도 이를 수용하게 된다.

법은 국내법이건 국제법이건 복잡하고 세밀하게 규정할수록 논쟁의 소지가 많다. 동중국해와같이 동일한 공유대륙붕을 사이에 두고 대향국 이건 인접국 이건 양국 간 거리가 400해리가 안 되는 경우, 이들 국가 사이에 대륙붕 경계와 EEZ 경계를 획정하는 문제는 심각한 분쟁의 소지를 내포한다. 대륙붕이나 배타적 경제수역의 해양경계는 역사적 권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과 형평성을 고려하여 경계획정을 설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수심 200m까지의 대륙붕을 석유 ·가스 탐사대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193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멕시코 만안, 루이지애나 근해, 보르네오의 브루나이 근해에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철 구조물에 의한 고정식 승강장이 루이지애나 근해에 설치되어 해양유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해양유전의 탐사개발이 개시되었다.

1950년대는 종래의 고정식 승강장 대신에 굴착장치로 잭업형 굴착장치, 굴착선 등의 이동식 굴착장치의 개발 기술이 탐사·상업생산에 기여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만의 사우디아라비아 근해에서 세계 최대 해양유전이인 사파니아 유전이 이 무렵 발견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알래스카·나이지리아·가봉·이집트의 수에즈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스 해협, 브루나이 등에서 유전이, 북해와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등에서 대규모의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제주도 남쪽바다부터 일본 오키나와 해구 직전까지 이어진 8만 2000 ㎢ 면적의 대륙붕인 제7광구가 주목받은 건 60년대 후반부터다. 1968년 10월부터 11월까지 유엔 극동경제위원회(ECAFE, 오늘날 ESCAP)는 미국 우즈홀해양연구소의 K.O. 에머리박사를 단장으로 미국 해군 해양연구소와 서해와 동중국해 대륙붕 지역을 탐사했다.

놀랍게도 1969년 ‘타이완과 일본에 이르는 동중국해 대륙붕에 미래 유망한 석유·가스 광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ECAFE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 후 제7광구의 원유·가스 매장량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문건은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2005년에 발표한 ‘동북아의 해저 석유보고서’다. 원유 매장량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약 40%, 천연가스는 10배다. 미국 우드로윌슨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제7광구가 위치한 대륙붕 전체에 매장된 천연가스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10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원유 매장량도 1000억 배럴로 미국 전체 매장량의 4.5배 규모로 추정됐다. 매장량 5억 배럴이 넘는 유전을 ‘자이안트’라 부르며, 제7광구는 자이안트 유전을 다수 보유한 ‘아시아의 페르시아 만’이 되는 셈이다.

ECAFE보고서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한국, 일본, 중국(대만)은 1970년 자국의 국내법에 따라 17개 해저광구를 성급하게 설정했으며, 국가 간에는 서로 중첩되는 수역이 발생했다. 한국과 일본 간 중첩이 되는 것은 제7광구였다.

박정희정부는 1969년 국제사법재판소의 북해대륙붕사건 판결 직후 1970년 1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제정하고 한국 주변 해역 8개 해저광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대륙자연 연장론’이 강조됐던 1958년 제1차 유엔해양법회의의 ‘대륙붕협약’과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에 기초해 우리나라 대륙붕이 제주도로부터 오키나와 해구에까지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다는 해양지리학적 사실을 제시하며 동중국해 방면으로 7광구를 설정한 것이다.

거리상으로는 7광구와 일본이 더 가깝지만 7광구와 오키나와 사이에는 대륙붕이 단절된 거대한 해구가 존재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당시 해저의 지질·지형학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중간선을 토대로 대륙붕 경계를 획정하는 방식인 ‘중간선원칙’을 고수하던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륙붕 문제에 관한 협의를 요청했다. 오키나와 해구까지 대륙붕의 자연적 연장과 형평성의 원칙을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이 전적으로 수용되면서 한·일 공동개발구역은 한·일 중간선에서 일본 쪽으로 치우치게 됐다.

이에 따라 1974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양국에 인접한 대륙붕 남부구역 공동개발에 관한 협정’(이하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협정)이 체결됐다.

한·일 대륙붕공동개발협정 체결은 1974년 1월에 이루어졌으나, 일본의회가 협정발효 비준을 지연시켜 늦어지다가 1977년 3월 임시국회에서 동의안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가결되었다. 한일 양국은 1978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1974년 협정을 조인한 이래 4년 5개월 만에 발효시켰다. 1978년 한일대륙붕개발협정 비준 당시 한국 측은 박정희 대통령과 외무부장관 박동진, 일본 측은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외무대신 소노다 스나오였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면서 한일대륙붕공동개발 협정은 추동력이 크게 약화됐다.

한일대륙붕 협정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일류책사들의 지모와 책략이 총동원되었고, 미국과 중국의 관심은 뜨거웠다. 1974년 1월 30일 체결되고 1978년 6월 22일 발효된 ‘한·일 대륙붕협정’의 협정종료 시점은 2028년이다. 한일대륙붕 공동개발은 50년을 장기목표로 했지만, 상업생산은 42년이 경과한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어느덧 끝내기의 초읽기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국제외교의 관행은 양국 간 협정 종료일 기준 3년 전에 종료의사를 표명하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2025년 전 후 7광구 문제 실효성을 위한 협상은 다시 한·일 간에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협상을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협상의 실패를 막는다. 한일외교문제, 특히 해양문제는 한국에게 미리 협상을 준비하지 못할 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는 단골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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