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한 뒤 연설하는 모습. (사진=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한 뒤 연설하는 모습. (사진=대통령실 제공)

미국 정치권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당근과 채찍을 마침내 마련했다. 

‘반도체와 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이 그 주인공이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1년여 가까이 의회에서 공전을 거듭하며 우려를 낳기도 했지만 미국 반도체 산업에서 공백으로 남은 파운드리(위탁생산)를 육성해 반도체 종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면에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견제 의중이 담겨 있어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반도체 업계도 향후 달라질 반도체 산업 지형에 대비하고 미·중 갈등 사이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미국이 2000억달러(약 260조원)의 연방 정부 예산을 투입해 첨단 과학분야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는 520억달러(약 68조원)의 자금이 투입된다. 미 정부는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은 물론 기초과학과 연구개발 분야까지 종합적인 지원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의 시초였다. 과거 독보적인 반도체 1위 국가였지만 이후 일본, 한국,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급부상하며 과거에 비해 위상이 크게 약화했다.

인텔의 예를 보자. 미국 기업인 인텔은 1970년대에는 메모리 반도체인 D램을 제조했지만 이를 일본기업에 매각하고 개인용컴퓨터(PC) 시대 개막과 함께 PC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중심으로 변신했다. 이후 독보적인 세계 1위 반도체 업체가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생산 시설 투자를 통해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확대해도 인텔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반도체 설계를 하고 대만의 TSMC가 위탁생산을 하는 반도체 업계의 수직 계열화가 고착됐다. 삼성전자도 위탁생산을 강화해왔다. 반면 미국은 반도체 생산과 관련한 기술을 점차 잃어 갔다. 

미국 내에 수조원의 대규모 생산 설비 투자가 필요 없는 생산 구도는 미국도 반겼다. 유독성 물질을 필요로 하는 반도체 생산 공정을 해외에 두고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2000년대 초 필자가 방문했던 AMD, IBM의 미국 반도체 생산시설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이런 반도체 산업구도를 완전히 뒤바꿨다. 언택트와 전기차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반도체 공급망 붕괴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했다. 반도체 공급망 붕괴는 자동차 생산을 위축시켰고 카 인플레이션과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을 축소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대책 회의를 열고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대책 마련을 촉구할 만큼 상황이 시급했다.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전기차 전환 전략 역시 반도체 수급을 꼬이게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사라진 미국 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부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확보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목표는 미국 정부가 대규모 예산을 집행할 이유로 충분했다. 

인텔은 이번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 개막 이후 추락을 거듭했던 인텔은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생산라인 확보 전략에 적극 호응했다. 퇴출했던 위탁생산 사업을 재개하고 대규모 생산시설을 미국에 건립하겠다며 '메이드인 USA 반도체' 재건을 약속하고 미 정부의 지원을 촉구했다. 

미 정부는 해외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생산시설 확대도 희망했고 그 결과 삼성전자, TSMC가 미국에 수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했다.

반도체와 과학법은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중국은 반도체 후진국이었지만 이제는 대규모 시설 투자와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 지원 속에 급격한 성장을 해왔다. 

미·중 갈등 속에 미국은 더 이상 중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지켜만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중국이 집중 육성 중인 전기차 산업도 배터리와 함께 반도체가 필수적이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에 나선 이유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기술을 이용해 중국이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쥐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 최소한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 마련도 시급했다.

불똥은 우리 기업으로 튈 수밖에 없다.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 혜택을 받은 기업에 대해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 투자를 제한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영향권에 들어간다. 

두 회사 모두 중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현대화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 사업을 확대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두 회사는 미국 투자를 결정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 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고 미국 반도체 투자를 결정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백악관으로 초대하는 것은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예다.

우리 기업들도 변화가 절실하다. D램과 위탁생산을 벗어나 진정한 비 메모리 반도체 설계 분야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이 분야는 미국이 철저하게 우선권을 쥐고 있다.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계기로 단순히 반도체 생산이 아닌 설계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 

반도체 설계와 생산이 모두 미국에서 진행된다면 한국 반도체의 지정학적 중요성도 낮아지게 된다. 미국이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도 반도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반도체 산업 역시 미국이 한국을 방어해야 하는 이유가 돼야 한다. 미국이 외교정책에도 반도체를 끌어들인 이유다. 한국, 미국, 일본, 대만 등 주요 반도체 생산국인 ‘칩4’(CHIPS4) 동맹은 미국 경제 외교의 중심이 반도체임을 보여준다. 

중국은 자국 산업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칩4 동맹이 불만스럽다. 미국과 우리 정부는 칩4 동맹이 중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연일 칩4 동맹을 비판 중이다. 

이 달은 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이다. 한중 수교가 한국 정치 경제의 전환점이 됐다면 칩4 동맹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외교 방향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기업은 물론 정부 차원의 섬세한 대비가 필요하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오피니언 부장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