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제공)
(사진=픽사베이 제공)

폭우가 세차게 퍼붓는 날 짙푸른 숲을 향해 공을 날려 보냈다. 자욱한 빗줄기를 뚫고 날아간 공은 빗발이 만들어 낸 희뿌연 안개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후덥지근한 더위를 식히는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연습장 전방 3면은 절정을 치닫는 청록의 숲으로 에워싸였다. 절로 시큼한 막걸리가 당기는 날이다.

용케 막걸리를 재촉하는 목을 달래며 3시간 동안 8박스를 날렸다. 한 박스에 대략 98~100개가 담겼으니 800개 가까이 친 셈이다. 생애 최고 기록이다. 3년 전 7박스까지 쳐본 적은 있다. 이후 꾸준히 하루 3~4박스를 치다 폭우 퍼붓는 날 느긋하게 연습하자고 맘먹었는데 생애 신기록이 됐다.

마음 같아서는 두 박스 정도는 더 칠 수 있었으나 관악산 입구 주막에서의 막걸리 회동을 기다리며 끝내기를 바라는 기색이 뚜렷한 옆 타석 선배님을 생각해서 골프채를 거두었다.

힘들이지 않고 3시간 동안 800개의 공을 치고도 가뿐한 느낌은 내게도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느낌으로 공을 날려 보냈는가를.

골프를 향상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를 갖느냐가 골프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프황제 잭 니클라우스는 샷을 할 때마다 생애 최고 샷의 기억을 떠올린다고 했다. 미스샷은 아예 발도 못 붙이게 하는 그만의 비법이다.

그날, 폭우 쏟아지는 속에서 우연히 내게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왜 빈 스윙은 그림처럼 만들어내면서 앞에 공만 놓여 있으면 스윙이 일그러지고 말까. 이런 생각을 머리에 담고 스윙했다.

미국의 저명한 레슨프로들이 강조하는 노볼 메소드(No ball method) 연습법은 바로 빈 스윙하듯 스윙하라는 가르침이다. 즉 공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윙하는 방법이다.

공에서 물러나 클럽을 휘두르는 빈 스윙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백스윙에서부터 팔로우 스윙까지 흠잡을 데가 없다. 중심축이 흔들리는 것은 다음 문제다. 백스윙과 팔로우 스윙이 완전히 이뤄지기만 하면 중심축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양발 앞에 공이 놓여 있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백스윙은 올라가다 말고 팔로우 스윙도 가다 만다. 백스윙과 팔로우 스윙이 완성되지 않는 문제는 많은 골퍼의 고민거리다.

노볼 메소드가 효과적이긴 하지만 지속해서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골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기억이 그렇듯 이 비법 또한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골프의 모든 비법은 재생시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워지기 시작한다.

노볼 메소드보다 더 강한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폭우 속으로 공을 날려 보내면서 공에 대한 강한 집착이 공과 클럽헤드를 무언가 끈으로 연결했다는 생각을 했다. 고무줄 같은 신축성 있는 어떤 끈이 공과 클럽헤드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바로 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공을 강하게 때려내겠다는 생각, 그것도 멀리 정확하게 때려내겠다는 욕심, 동반자보다 나은 샷을 날리겠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끈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심리적 끈 때문에 백스윙은 올라가다 말고 팔로우 스윙도 가다 마는 것이다. 백스윙이나 팔로우 스윙을 완전히 하고 싶지만, 이 끈이 방해한다.

그렇다면 이 끈을 잘라버리면 되지 않는가! 순간 무릎을 쳤다. 가위로 이 끈을, 클럽 헤드와 공에 연결된 이 끈을 싹둑 잘라버리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머리가 번쩍했다.

그래, 가위로 보이지 않는 끈을 싹둑 잘랐다. 물론 마음속으로. 끊어진 끈이 맥없이 늘어진 이미지도 그려졌다. 이런 이미지를 갖고 스윙했더니 확실히 달라졌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졌다. 서예의 일필휘지 같은 스윙이 어렵지 않게 만들어졌다.

그동안 공을 멀리 때려 보내겠다는 과도한 집착이 내 스윙에 거미줄을 치고 그물을 뒤집어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골프의 스윙은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시위를 당긴 뒤 놓는 순간 활의 운명은 결정돼 있다. 공의 운명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스윙으로 결정된다.

나의 온갖 마음이 만들어낸 거미줄과 그물에서 벗어난 스윙이야말로 최상의 스윙임을 깨닫는 희열은 대단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은 바로 올바른 스윙을 희구하는 골퍼들을 위한 주문이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주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은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골프 애호가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방민준 골프한국 칼럼니스트 weeklyh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