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제임스 클리번 하원의원, 프랭크 펄론 하원의원, 캐시 캐스터 하원의원. (사진=연합뉴스 제공)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 맨친 상원의원, 척 슈머 상원의원, 제임스 클리번 하원의원, 프랭크 펄론 하원의원, 캐시 캐스터 하원의원.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하원에서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of 2022, 이하 인플레 감축법)이 통과됐다. 이는 미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더 나은 재건법’(Build Back Better Act)의 규모를 크게 축소시킨 것으로 친환경산업 육성에 3690억달러, 노인층 약값 인하에 640억달러를 쓰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감축하겠다는 목표 하에 친환경 에너지 생산 및 투자에 대해 세액을 공제하고, 풍력·태양광 관련 기업에 대해 금융 및 기술 지원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전기차를 구매할 경우 신차는 최대 7500달러, 중고차는 최대 4000달러의 세액을 공제하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재원조달 방안으로는 연평균 이익이 10억달러 이상인 기업(제조업 제외)을 대상으로 15%의 최저법인세를 적용하겠다는 방안을 내놨다. 미국 법인세율은 21%이지만 각종 감면과 공제 등으로 실효세율은 15%를 밑돈다. 미국 정부는 그 하한선을 설정해 세수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최근 발효된 ‘반도체와 과학법’이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의 진흥과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노린 것이라면 인플레 감축법은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차·배터리 산업의 발전과 유리한 글로벌 공급망의 구축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미래 핵심 제조업을 놓고 중국과 벌이는 패권경쟁의 큰 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법안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전기차는 북미에서 생산된 것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도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다. 배터리 부품의 가치 중 50% 이상이 북미에서 생산되면 3750달러, 배터리 소재가 되는 광물 가치의 40% 이상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되면 3750달러의 보조금을 받도록 돼 있다. 더구나 이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진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팔려면 미국에 생산 기지를 두고, 배터리에 필요한 소재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에서 조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차를 생산하는 기업에게 도전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미국에 전기차 생산기지를 두고 있지 않다. 새로운 공장의 건설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시장 선점이 중요한 초기에 경쟁 우위를 잃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배터리 소재를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에서 조달하라는 것도 어려운 조건이다. 2020년 기준 글로벌 배터리 4대 소재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은 양극재 57.8%, 음극재 66.4%, 분리막 54.6%, 전해액 71.7%로 절대적이다. 광물의 경우에도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아르헨티나와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칠레, 호주 등 극히 제한된 국가만 남게 된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중국 중 택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매우 빡빡한 일정표를 제시하고 자국 기업에 유리한 조건을 달고 있다. 이러한 미국 정책은 우리나라 기업에게 굉장한 도전이 될 것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육성에 관한 내용에 가려져 있지만 건강보험 및 약값과 관련된 내용도 놓칠 수 없다. 법안에 따르면 미국의 전 국민 대상 건강보험인 오바마 케어 가입자 1300만명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기간 동안 확대된 정부 보조(연 800달러)를 3년간 연장한다. 

노년층과 장애인 6500만명이 이용하고 있는 정부의료보험, 메디케어 이용자들은 2025년부터 본인부담금의 1년 한도가 2000달러로 정해진다. 2026년부터는 메디케어 이용자 대상으로 하는 10종의 처방약 가격을 두고 정부와 제약사들이 협상을 벌일 수 있게 된다. 

미국은 약값이 높기로 유명한 나라다. 같은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미국 약값은 다른 나라에 비해 평균 3배 정도 비싸다고 알려져 있다. 올해 승인된 신약 가격의 중간값은 25만7000달러가 넘는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정부 개입이 신약 개발을 저해한다’는 명분으로 제약 회사가 처방약 가격을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었다. 

이번에 취약계층인 메디케어 이용자에게 겨우 10종의 처방약 가격을 인하해줄 여지를 여는데도 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미국인은 여전히 비싼 약값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인이 1년 동안 지불하는 약값은 5000억달러에 이르지만 이것도 의료비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5조달러의 의료비는 미국 국민총생산(GDP)의 20%에 달한다. 미국 제약사와 의료기관, 보험사 등으로 연결되는 소수의 이익추구 행위가 국민적으로 얼마나 큰 부담을 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걸핏하면 의료를 신성장 산업으로 내세우며 의료 민영화를 이슈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우리나라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미국이 이 법안으로 대규모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에 나선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감세와 재정 지출 감축을 통해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법안 이름이 인플레 감축법이지만 실상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이 인플레이션 완화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오히려 금리 인상에 따라 예상되는 경기 냉각을 막기 위한 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은 금리 인상을 통해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 3월부터 기준 금리를 인상하고 있는데 인상 폭이 0.25%포인트에서 0.75%포인트로 갈수록 커져 현재 2.5%에 이르고 있다. 통화 긴축이 과감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행은 한참 전인 지난해 8월부터 금리 인상을 시작했으나 인상 폭이 미미해 현재 2.25%로 미국에 역전된 상태다. 우리의 경우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보다 과감한 금리 인상이 요구되지만 산업에 미치는 악영향, 부동산 경착륙에 대한 우려로 인해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향후 금리를 크게 올리는 ‘빅 스텝’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점차 커질 수 있는 한미간 금리 격차가 혹여 외국인 자본 유출로 이어질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국이 금리 인상 속도를 높이면 결국 우리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경제는 크게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통화 정책의 한계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감세를 통해 재정 여력을 줄이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국유재산을 매각하는 정책은 일관성도 없고 방향이 제대로 된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마땅히 재정 여력을 확충하면서 만약에 올 수 있는 경기 충격에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보인다. 

미국의 인플레 감축법은 먼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웃집 불구경 거리가 아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각국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흐름에 맞춰 파도를 잘 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정인호 객원기자 프로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 경제학 박사 ▲KT경제경영연구소 IT 정책연구 담당(상무보) ▲KT그룹 컨설팅지원실 이사 ▲건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낸 경제 및 IT 정책 전문가


정인호 객원기자 yourinh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