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1부 합류...‘퍼펙트큐’로 보답

프로당구 선수 이영천이 스트로크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이영천이 스트로크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프로 스포츠는 ‘꿈’을 먹고 사는 생태계이다. 약육강식의 경쟁 구도도 치열해도 실력만 뒷받침되면 언제든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은 오늘도 혹독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굵은 땀을 흘리며 기회를 엿본다. PBA 중견인 이영천(48) 선수는 도전을 꿈꾸는 젊은 선수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생계를 위한 당구장 경영에 묶여 제대로 연습을 못해 2부 리그인 드림투어를 전전한 그는 이번 시즌 1부 리그 등극에 성공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퍼펙트큐’(이닝과 관계없이 한 큐에 15득점을 해 세트를 마무리하는 이벤트)를 달성하고 개인전 16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철저한 무명이었던 ‘당구장 사장님’에서 당당한 1부 리그 선수로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이다.

천직으로 택한 당구장 사장
영업 도움 기대해 선수로 등록

이영천은 대학 졸업 후 취직보다는 자영업의 길을 택했다. 아디다스 매장을 거쳐 편의점 위탁경영 등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30살 무렵 당구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당구장을 찾았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당구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4구 기준 300점 수준의 실력이었다. 하지만 평소 당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다가 당구장 경영을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현실적인 형편도 당구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아버지가 자금을 보태주긴 했지만 흔한 편의점을 열기에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금이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도 자영업을 하셨기 때문에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누구보다 잘 알아 처음에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당구장이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영업 자체의 길을 막고 싶었던 거죠. 결국 제가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께서 2500만원 정도를 보태주셨어요. 사업을 하다가 잃어도 좋은, 경험삼아 필요한 돈이라 여기면서 주신 것 같아요. 결국 하루 매출 7만원 정도에 불과한 망해가는 당구장을 싸게 인수해 시작하게 된 겁니다.”

프로당구 선수 이영천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처음 경험하는 당구장 경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청소하면서 치우고 정리하는 일은 특유의 성실함을 앞세워 극복을 했다. 손님들과의 관계나 아르바이트를 부리는 요령 등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점점 노하우가 쌓인 이영천은 하루 매출 30만원의 실적을 올리는 당구장으로 바꿔 놓았다. 그 경험을 살려 서울의 봉천동, 신대방동 등지에서 잇달아 당구장을 개업했다. 많을 때는 당구장 3개를 동시에 경영하는 뒷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다 6년 전부터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자리를 잡아 컨테이너당구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이영천은 애초에 당구 선수를 꿈꾸지 않았다. 그가 서울당구연맹 선수로 등록한 이유도 당구장 영업 때문이었다. 중대에서 대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맞춰 선수로 활동을 하면 당구장 영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변 지인들의 권유가 영향을 미쳤다.

“당구장을 하면서 틈틈이 연습을 해 실력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서울당구연맹에서 주최하는 동호인 대회에 참가해 3등을 하면서 자동으로 선수가 된 겁니다. 막상 선수가 됐지만 당구장 때문에 지방대회를 참가하지는 못했어요. 선수들과 교류를 해 인맥이 넓어진 점은 좋았지만 실제 당구장 영업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녹록치 않은 1부 투어 벽
당구장에 매여 충분한 연습 못 해

프로당구 선수 이영천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2019~2020 시즌부터 드림투어에서 활동한 이영천은 천신만고 끝에 트라이아웃을 통과해 올해 시즌부터 1부 투어에 참가했다. 희망을 가득 품고 설렌 마음으로 시작한 1부 투어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여느 일류 선수처럼 마음껏 연습을 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다.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 당구장은 보통 새벽 2시가 넘어 영업을 마친다. 연습은 영업 중 짬을 내 1~2시간, 문 닫고 새벽에 1~2시간 정도만 가능했다. 그마저 힘이 부쳐 새벽 연습은 건너뛰기가 일쑤였다.

이영천은 지난 6월 개막전인 ‘블루원리조트 PBA 챔피언십’에서 처음으로 다비드 마르티네스(블루원리조트) 선수와 128강전 방송경기가 잡혔다. 그 당시 설렘과 긴장감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했다.

“처음 접하는 방송 세트장, 조명 등이 너무 낯설어 집중하기가 힘들었어요. 또 마르티네스 선수가 우승 경험도 있는 강자여서 아무래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죠. 심적으로 안정감을 찾지 못해 제가 가지고 있는 실력의 50%도 발휘를 못한 것 같아요. 결국 3세트를 다 내주고 패하고 말았는데 좀 허탈했죠.”

이영천은 두 번째 대회에서 마르티네스에게 설욕하는데 성공했다. 두 선수는 시즌 2차 투어 '하나카드 PBA 챔피언십' 128강전에서 다시 만났다. 지난 경기와는 달리 이영천이 먼저 두 세트를 가져왔다. 마르티네스에게 3세트를 내줬지만 4세트에서 연속타가 터져 승리를 거머쥐었다.

“결국 경험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달은 경기였습니다. 강자인 마르티테스를 다시 만났지만 처음과는 달리 긴장감이 줄어들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죠. 그래서 내가 준비한 모습만 보여주자고 경기에 임했더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부친상 슬픔 딛고 일군 ‘퍼펙트큐’
우상 쿠드롱과의 맞대결도 성사

추석 연휴 기간 중 열린 'TS샴푸·푸라닭 PBA 챔피언십' 대회는 그의 당구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조건휘(SK렌터카) 선수를 상대로 한 32강 경기에서 올 시즌 세 번째 퍼펙트큐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영천은 이번 퍼펙트큐 달성이 더욱 남달랐다. 대회 직전 부친상을 겪어 제대로 대회를 준비할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8월말 아버지께서 작고하시는 바람에 장례 등을 치르느라 거의 연습을 하지 못했어요. 심신도 많이 지친 상태였고요. 경기 전날 지인에게 ‘이번에 퍼펙트큐 하고 오겠다’라고 농담성 예고(?)를 했는데 실제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무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들한테 힘을 주신 것 같습니다.”

펴펙트큐를 달성해 뉴스에 나오자 그의 가족들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과묵한 편이어서 당구와 관련된 일은 가족들한테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가족들도 상금이 1000만원이나 된다는 사실을 기사에서 보고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내가 많이 기뻐했습니다. 묵묵히 저를 응원해주기만 했는데 거금의 상금까지 타게 됐으니 뿌듯했겠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구장을 하는 건 알았지만 제가 프로 선수라는 것을 잘 모르셨어요. 저 또한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드리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다가 누나한테 전화를 받은 뒤 정말 놀라고 기뻐하셨다는 거예요. 집안에 프로 선수가 있다는 것만 해도 경사라면서요.”

이영천은 퍼펙트큐 외에도 두 가지 성과를 더 이뤘다. 처음으로 1부 투어 16강까지 진출했다는 점이 첫 번째 성과이다. 두 번째 성과는 평소 우상이었던 프레드릭 쿠드롱(웰컴저축은행)과 공식 맞대결을 펼치는 영광을 경험한 것이다.

“우상인 쿠드롱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 정말 감회가 남달랐어요. 쿠드롱처럼 빠른 초이스를 하고, 초이스가 결정되면 과감하게 공략하는 스타일이 제가 추구하는 당구이거든요. 우상과의 대결은 긴장이 돼 떨리면서도 소중한 순간을 즐기자는 감정이 서로 교차했죠. 결과적으로 패배했지만 세 번째 정도 만났을 때 설욕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어요. 아무리 우상이어도 넘어야할 산은 넘어야 프로로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1부 투어 경험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평소 만나기 어려운 강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최대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멘탈적인 부분까지 큰 자양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강자들과 경기를 하면서 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느끼지는 않았어요. 다만 경험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멘탈적인 부분에서 아직 격차가 크다는 점을 깨우쳤죠. 체력을 다지고 심리적 안정을 강화하면 이제는 어떤 선수와 붙어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올해는 1부 리그 잔류가 목표”

프로당구 선수 이영천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이영천이 가장 자신감을 갖는 배치는 뒤돌려치기를 꼽을 수 있다. 그의 뒤돌려치기는 여느 선수와는 궤적이 좀 다르다. 포지션 플레이를 염두에 둔 스피드와 힘의 배합에 중점을 두고 있다.

“1목적구가 4쿠션으로 가는 라인을 나름대로 정형화시켰어요. 일반 선수들과 비교해 4쿠션으로 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스피드와 힘의 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지션이 연결되도록 두께 설정도 차이가 있죠. 다른 선수도 그 방식이 독특하게 보이는지 흥미를 많이 갖기도 해요.”

PBA 강자들과 맞붙어 자신감을 키운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우선 1부 리그에 잔류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1부 리그 선수 중 30% 정도는 시즌 중 1승도 못 거두고 트라이아웃으로 밀려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1부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은 젊은 시절 각자의 지역에서 나름 신동 소리를 들었던 실력자들이 대부분이죠. 조금만 방심하면 탈락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일단 어렵게 올라온 1부 리그에 잔류를 한 다음 조금씩 내 목표를 올려 잡으려고 합니다.”

잔류를 위해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훈련하는 방식은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안정된 자세와 배치별로 적용할 스트로크를 더욱 가다듬는 것에 역점을 둔다. 기본기가 튼튼해야 긴장된 순간이나 쫓기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레슨을 할 때도 가장 먼저 편한 자세를 잡아 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편이죠. 지금 자세로 당구를 치면 어디 불편한 곳이 없는지 반드시 물어봅니다. 자세가 편하지 않으면 어딘가 불편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세를 교정한 이후에는 스트로크에 비중을 둡니다. 숏, 미들, 롱팔로우 샷을 구분해서 가르치죠. 특히 롱팔로우 샷을 많이 낯설어하기 때문에 왜 필요하고 어떤 때 사용해야 하는 지도 강조해줍니다.”

이영천은 자신만의 연습 시간이 부족한 점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당구장 경영을 등한시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그래서 체력을 다지기 위해 매주 주변 산을 찾는다. 평소에 체력 훈련을 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어서 주말 오전 시간을 활용해 등산으로 체력을 쌓고 있는 것이다. 

“중견 선수 입장에서는 기술적인 부분을 새로 배우기보다는 평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멘탈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주변의 또래 선수들도 최근 체력 훈련에 매진하고 있어요. 저도 그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체력 유지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편입니다.”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