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슬럼프를 벗어난 기적의 준우승

프로당구 선수 이마리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이마리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반평생을 함께 한 당구와 결혼했어요”

당구 경력만 거의 3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LPBA 선수 이마리(51). 박신영 선수와 함께 한국 포켓볼 1세대 출신인 그는 당구 팬 사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로리그 출범 이후 최고 성적이 8강이었고 대부분은 예선 초반부터 탈락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프로리그 출범 이전 대한당구연맹 소속 3쿠션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에는 국내 정상권을 유지한 강자 중 한 명이었다. 이마리의 얼굴이 알려진 계기는 올 시즌 LPBA 3차투어에서 ‘일본의 전설’인 히다 오리에(SK렌터카) 선수와의 결승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결승전 이후 얼굴을 알아본 택시 기사의 요청으로 생애 첫 사인을 해 줄 정도로 유명세를 경험했다. 아직 미혼인 그는 당구와 이미 결혼했다고 농을 던지기도 했다. 50대의 나이에도 아직 당구에 대한 열정은 젊은 후배들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의 프로선수 도전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수 있다.

미국 이민 후 포켓볼로 위안
두께감 천부적 재능 깨달아

이마리는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미국 휴스턴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 나이에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기만 했다.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자연스럽게 교포들이 모이는 교회를 다녔다.

“우연히 교회 오빠들이 주로 놀러 가는 포켓볼 클럽을 따라가 우연히 포켓볼을 접했어요. 처음에는 구경만 했는데 늘 지는 지인에게 잘 좀 치라고 타박하자 ‘그러면 네가 해봐라’하고 큐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어설프게 샷을 했는데 1목적구가 그대로 코너로 들어가 저도 놀랬죠. 그리고는 갑자기 포켓볼에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그는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다. 포켓볼을 접한 지 이틀 후부터는 그 클럽의 단골들을 모두 젖히고 ‘불패의 고수’가 된 것이다. 그렇게 1년 정도 심심풀이로 포켓볼을 치다가 자연스럽게 관심이 줄면서 큐를 잡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이민 2년 만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가 겁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학업 진도를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죠. 그래서 친척들과 상의한 결과 미국에 남기로 한 거죠. 마침 법정대리인이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이마리는 미국 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줄 사람도 없는 혈혈단신이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총기를 든 강도를 만나 목숨이 위협을 받는 경험까지 하는 등 험한 타향살이에 지쳐 23살에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영어 강사로 취직한 그는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포켓볼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큐를 잡았지만 천부적으로 두께를 맞추는 재능이 뛰어났다. 주변에서 그를 이길만한 상대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길을 걷다가 백화점 앞에서 우연히 아마추어 여성 8볼 대회가 열린다는 광고를 접했어요. 그런 대회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신기해서 참가했다가 바로 우승을 해버렸죠. 당시 우승상금이 50~60만원 정도였는데 용돈치고는 제법 쏠쏠한 편이어서 아마추어 대회마다 찾아다녀 상위권 입상을 밥 먹듯이 한 기억이 나요.”

하지만 독보적으로 대회를 휩쓸자 참가자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 이마리가 참가하면 상금을 탈 가능성이 희박해 대회 참가자 수가 현격히 감소한 것이다. 결국 대회 주최 측 등의 압박으로 더이상 아마추어 대회를 나가지 못하게 됐다.

이마리는 당연히 선수 등록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학원 강사를 겸직하는 상황에서 지방대회에 참가하기도 어렵고 생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약 1년 정도 포켓볼 선수로 활동하다가 접은 이유다.

30대 중반에 3쿠션 전환
프로 입문 후 슬럼프 4년 시달려

프로당구 선수 이마리가 경기도 고양시 로켓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선수는 그만뒀지만, 취미로 포켓볼을 즐기는 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2003년 무렵 우연히 국제식 대대를 처음 경험했다. 넓은 공간에서 미끄러지듯 굴러가 목적구를 맞추는 3쿠션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서울 삼성동의 뉴코리아당구장이었는데 서울당구연맹 회장님께서 운영하셨어요. 제가 8점부터 놓고 3쿠션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는데 나중에 회장님이 선수 등록을 권유해서 자연스럽게 3쿠션 선수가 됐죠.”

이마리가 3쿠션에 발을 들이기 시작할 때가 30대 중반이었다. 늦은 나이에 출발했지만 재능이 남달랐던 탓인지 국내 대회에서 돋보이는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1년 결산을 하는 왕중왕전 우승을 하는 등 정상권 선수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영어에 능통해 글로벌 이벤트 대회인 LGU+컵과 3쿠션월드컵 대회 등에서 10여 년 동안 장내 영어 아나운서과 통역을 도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성적이 뒷받침된 탓인지 프로리그가 출범하자 그는 큰 고민 없이 LPBA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프로 도전기는 출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첫 대회에서 하루에 네 경기를 치르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을 전혀 못 했어요. 나중에는 체력적으로 거의 방전이 될 정도였죠. 그 이후 예선전 1, 2회전 탈락을 밥 먹듯이 반복했어요. 잠깐 반짝해서 낸 최고 성적이 8강에 불과했어요. 나중에는 방송 화면에 나이가 든 제 얼굴이 나오는 것도 적응하지 못했고 선배라는 자존심 때문에 키스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평소 치던 공도 헤매기 일쑤였어요.” 

프로 출범 후 시작된 그의 슬럼프는 4년 동안 이어졌다. 말 그대로 악몽을 꿀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하루 수면 시간은 불과 3~4시간에 불과할 정도였다. 시합만 나가면 빨리 경기를 마치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가 뒤늦게 모신 스승으로부터 배운 방식과 제가 평소 치던 방식이 엉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PBA 1부리그에 참가하고 계신 성상은 선수가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스승님이시거든요. 화려한 기술보다는 당점, 힘배합, 스트로크 변화 등의 원리로 자연스럽게 배치를 해결하는 방법이 저하고 잘 맞았다고 여겨 가르침을 부탁드렸어요. 그러나 제가 부족해서 온전히 녹이지 못한 채 엉켜버린 거죠.”

부진이 길어지자 50이 넘은 나이도 부담이 돼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한 적도 있다. 주변 지인들과도 상담했지만 마땅한 답을 찾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스스로 해법을 찾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일본 전설’ 히다와 결승 이후
당구에 새로운 눈을 뜨다

프로당구 선수 이마리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이마리는 3차대회인 ‘TS샴푸·푸라닭 PBA-LPBA 챔피언십’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최고참 선수로서의 자격지심이나 아마추어 시절의 성적 등에 대한 부담감을 다 내려놓았다. 실패를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보다 내 경기에만 집중하고 즐기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임했다. 모든 것을 비운 마음가짐이 통했을까. 그는 승승장구를 이어가 4강전에서 난적 김가영(하나카드) 선수를 꺾고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결승전 상대는 ‘살아있는 일본의 레전드’로 불리는 전 세계 랭킹 1위 히다 선수였다. 두 선수 모두 LPBA 결승에 올라온 것이 처음이었다. 또한 애초 기대와 달리 오랜 기간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두 선수의 경력을 합치면 무려 70년에 육박할 정도의 노장 대결이라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면서 상대방의 점수는 신경 쓰지 않고 제 당구에만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다짐하자 부담감은 사라지고 공이 편하게 맞는 거예요. 사실 김가영 선수와의 4강전이 가장 큰 고비였는데 상대방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앞에 놓인 공에만 집중하니까 어느새 승리하게 됐죠. 결승에서도 히다 선수의 화려한 경력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공을 쳤던 것 같아요. 정말 오래간만에 제 당구를 구사한 느낌이었죠. 그래서 우승을 놓친 아쉬움은 전혀 없어요.”

그는 3차 대회를 거치면서 다시 당구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마련했다. 방송을 통해 노출된 나이가 든 외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실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집중하지 못하던 모습을 털어냈다. 그러자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공략에 필요한 다양한 길들이 보여 편하게 공을 칠 수 있었다.

“일단 루틴이 달라졌어요. 평소 스롱 피아비(블루원엔젤스)나 김가영 선수의 집중력과 투지를 배우기 위해 경기 영상을 자주 찾아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스스로 집중하는 루틴을 찾게 된 거죠. 그 부분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는 마음 편하게 다음 대회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정도입니다. 이 나이에 갑자기 각성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긴 해요.”

준우승 이후 연습장에서 동호인들과 게임을 하면서도 달라진 모습을 자각했다. 예전에는 연습게임에 임해도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 치는 경우도 많았다. 승리를 위해 몰두하는 루틴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매번 연습게임에 임해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루틴을 이어갔다. 자연스럽게 득점 성공률이 높아졌고 다양한 배치의 공략 방법도 간결하게 해결했다. 

“다음에는 피아비 선수와 맞붙고 싶어요. 사실 연맹 시절에는 피아비를 이긴 적이 있는데 당시만 해도 그 선수의 실력이 여물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LPBA 1인자 중 한 명이 됐죠. 그래서 지금 얼마나 실력이 출중해졌는지 몸으로 체험하고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은퇴 후 여자 선수 코치가 꿈
직접 운영하는 당구클럽도 원해

프로당구 선수 이마리가 경기도 고양시 로켓당구클럽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이마리는 은퇴 이후에 대한 고민도 많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선수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는 강하다. 다만 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최근 후배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공존한다. 그와 달리 어린 시절부터 확실하게 기본기를 갖추는 과정을 대부분 거쳤기 때문이다. 그가 키스가 보여 머뭇거리는 배치에 대해서도 후배 선수들은 키스를 피하는 두께를 택한 뒤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샷을 하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은퇴 후에는 여성 해설자로도 활동했으면 해요. 궁극적으로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워 놓고는 있는데, 하나는 경험을 살린 여자 선수 코치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구클럽을 직접 차리고 싶어요. 연맹 시절에 이미 지도자 자격증과 심판 자격증은 획득했죠. 후진 양성에도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문제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당구를 배운 것이 아니어서 선수를 위한 심화 과정을 가르치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거든요. 그래서 자세, 스탠스, 스트로크 등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을 맡는 것이 맞는다고 봐요. 목돈이 크게 드는 당구클럽은 당장 차릴 여건이 안 되지만 은퇴를 대비해 언젠가는 이루고 싶습니다.”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