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부진 끊은 부활의 신호탄
위기마다 ‘긍정적 마인드’로 극복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PBA 신대권(45)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는 콧수염이다. 짧은 머리와 다부진 눈매와의 조화를 콧수염이 돋보이게 한다. 콧수염 덕분에 경기 도중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마초’ 분위기도 느껴진다. 실제로 그는 선후배 동료들과 끈끈한 의리와 우정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신대권은 나이로는 중견 선수지만, 선수 경력은 고참급이다.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시작해 올해로 벌써 27년째 접어들었다. 오랜 경력을 이어온 그의 얼굴이 익숙해진 것은 올해 들어서다. 프로리그 개막 원년 5차 대회에서 준결승에 오른 이후 부상 등의 여파로 오랜 기간 성적이 바닥권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신대권은 올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지난 7월 PBA 2차전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한 데 이어 대타 선수로 팀 리그에도 참여해 존재감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선수 등록
학생 때부터 아마 선수들과 어울려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서울 강남구 고리나코리아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인생을 살아오면서 당구를 선택한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신대권은 당구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무척 강하다. 인생 자체가 당구인 셈이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를 치른 뒤 남는 시간을 활용하고자 친구들과 당구장을 찾았다. 처음 접한 당구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처음 큐를 잡고 당구를 치는데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죠. 6개월 만에 4구 수지로 500점을 놓을 정도로 재능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의 격차가 금방 벌어질 정도였으니까요.”

서울 반포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그의 당구장 출입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애초부터 공부에 큰 관심이 없던 터라 오로지 당구에만 빠져들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당구 애호가여서 집안의 반대가 없었던 점도 당구에 전념할 여건을 마련해줬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3쿠션에 입문했다. 마침 학교 인근 당구장에 정상급 고수들이 단골로 들락거려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가 됐다.

“당시만 해도 국제식 대대를 갖춘 당구장이 흔하지 않을 때인데 학교 부근의 당구장에 대대를 차려 놓아 아마추어 정상급 고수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어린 고등학생이 3쿠션을 친다고 하니 귀엽게 봐줄 수밖에요. 덕분에 고수들과 어울려 당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죠.”

실력이 일취월장으로 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서인지 지인 중 한 명이 서울 영등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한국당구회관을 소개해줬다. 선수를 포함해 날고 긴다는 아마추어 고수들이 모인 ‘당구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당구클럽이었다. 신대권은 수업을 마치면 버스를 타고 매일 한국당구회관을 찾았다.

정상급 고수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삼촌뻘이나 그 이상인 대선배 선수들과도 어울릴 수가 있어서 당구 실력이 말 그대로 쑥쑥 늘어났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선수들의 추천으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당구연맹 선수로 등록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라 변변한 고정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당구선수의 위상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어요. 마냥 좋기만 했죠. 아버지께서도 큰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당시 ‘똘이 장군’으로 유명한 김정규 선배님이 사용하던 아담 큐를 구매해 선물로 주실 정도였으니까요. 그 시절만 해도 저처럼 어린 나이에 당구를 치겠다는 사례도 거의 드문 편이라 선배들의 애정을 흠뻑 받았던 것 같아요.”

당구계 지인에게 당한 사기
충격으로 4년간 반 은퇴 상태 돌입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신대권은 군대에서도 당구와의 인연을 계속 가져가는 행운을 잡았다. 신병훈련대에서 특기사항으로 당구선수 이력을 적었는데 평소 당구를 즐기던 대대장이 이를 눈여겨본 것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일병이 되자 신병훈련대 대대장이 그를 소환했다. 갑자기 전출을 온 신대권은 정훈병과 소속으로 당구장을 관리하는 병사가 된 것이다. 

부대 내 테니스장을 관리하는 ‘테니스병’처럼 ‘당구병’ 임무가 주어지자 일단 당구대 설치가 큰 과제였다. 결국 그의 하소연을 들은 선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당구대, 하우스 큐, 당구공 등을 중고로 구매해 부대에 설치하도록 도움을 줬다. 

“제대할 때 주임원사가 ‘너처럼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하다가 제대하는 놈은 처음 봤다’라고 덕담(?)을 건네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운이 참 좋은 편이었습니다. 남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당구 연습을 할 수 있었거든요.”

신대권이 결혼 적령기에 들어가자 그의 부친은 고정된 수입이 없는 당구선수 명함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버젓한 당구장 개업을 고민했다. 사회 경험이 미숙한 아들을 도와서 동업할 사람이 필요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선수 한 명에게 부탁해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제법 규모가 큰 당구장을 오픈했다. 그리고 신대권은 바로 결혼 준비에 나섰다. 그 이후 사고가 터졌다.

“아버지께서 잘 아는 지인에게 결과적으로 완전히 사기를 당했어요. 좁은 당구계에서 인맥이 다 연결되는데 설마 그 지인이 그런 사기를 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갓 결혼했을 때라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에는 당구대를 보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그는 이후 4년 동안 절반의 은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단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야 했다.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는 참가하지 못했다. 큰 열의도 없었다. 당구보다는 아이의 분윳값이 더 절박한 시절이었다.

“그나마 서울당구연맹이 주최하는 대회는 대부분 참여했습니다. 소속 선후배들과 워낙 가깝게 지낸 사이여서 친목 모임 나가는 셈 치고 대회에 임한 것이죠. 입상을 목표로 해서 대회에 나간 것은 아니고요.”

야스퍼스 꺾고 4년 공백기 벗어났지만
팔꿈치 부상으로 다시 부진의 늪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신대권이 다시 당구에 대한 열정을 찾은 계기는 2015년 호찌민 월드컵 3쿠션 대회이다. 머리도 식힐 겸 가족여행 삼아 베트남에 가자고 아내를 설득해서 월드컵 대회에 참가했다. 

그 대회에서 신대권은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4년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4대 천왕’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선수를 32강 전에서 승부치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물리친 것이다. 경기 내용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두 선수는 단 12이닝 만에 40점을 채웠다. 애버리지 3점이 넘는 미친 경기력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저도 정작 야스퍼스 선수를 이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천하의 야스퍼스가 승부치기 초구를 놓친 거예요. 제가 후구 칠 준비를 하니까 베트남 관중들의 야유 소리가 체육관을 들썩일 정도로 커지는 거예요. ‘듣보잡’인 저보다는 야스퍼스가 올라가야 더 흥미가 있다는 반응이었겠죠. 막상 후구 승부치기가 성공하자 큰 박수를 보내주긴 하더라고요. 16강 전에 올라갔지만, 타이푼 타스테미르(튀르키예) 선수에게 졌는데 결국 그 선수가 우승했어요. 타이푼 선수가 우승 직후 저한테 우승 후보인 야스퍼스를 막아줘서 고맙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죠.”

호찌민 월드컵 대회 이후 신대권은 사기를 당한 후유증을 벗어던지고 다시 선수 생활에 매진했다. 하지만 성적이 받쳐주지를 못했다. 전국대회만 나가면 경기가 잘 안 풀리고 꼬이는 상황이 반복됐다. 반면 서울당구연맹 대회에서는 매번 입상권에 들어가는 호성적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2019년 PBA가 출범하자 새로운 계기를 찾은 그는 프로의 문을 두들겼다.

“두 차례 프로화가 추진됐다가 좌절됐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프로 전향을 결심했죠. 하지만 처음에는 좀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랭킹 순위에 밀려 우선 지명 선수로 들어가지 못하고 트라이 아웃을 거쳐야 했거든요.”

신대권은 첫 시즌 ‘메디힐 챔피언십’에서 4강에 오른 이후 뚜렷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두 딸과 놀아주다가 당한 팔꿈치 부상에 시달려 2년 동안 부진의 늪에 빠진 것이다.

“부상 이후 샷을 할 때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고통이 컸어요. 나중에는 당구를 치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1년 동안 꾸준히 물리치료를 한 이후부터는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는 1부 리그 잔류를 위한 트라이 아웃을 거쳐 겨우 살아남았죠.”

올해 완벽한 부활에 성공
“평생 잊히지 않는 선수 되고파”

프로당구 선수 신대권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부상에서 벗어난 신대권은 아마추어 시절 강자의 면모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난 7월 ‘하나카드 챔피언십’ 8강전에서 ‘왼손의 마법사’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그리스) 선수를 꺾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무려 4년 만의 4강이었다. 

본격적인 부활에 성공한 그는 신종 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감염된 강동궁 선수를 대신해 SK렌터카 대체 선수로 팀 리그 3라운드에 합류했다. 그는 팀 리그 데뷔전에서 승리를 낚고 이후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는 활약으로 당구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실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크게 긴장하지는 않고 편하게 즐긴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팀원들도 평소 잘 알고 지낸 동료들이어서 어색한 점도 없었고 방송 경기도 많이 해봐서 낯설지도 않았죠. 팀 리그 대회 내내 ‘나한테만 부끄럽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그나마 팀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신대권은 대체 선수로 확정된 후 한 후배가 “이제 다시 돌아오신 거냐”라고 건넨 말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자신은 당구계를 떠나지 않았는데 왜 다시 돌아왔다고 표현한 것일까.

“문득 깨달았죠. 매스컴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제가 갑자기 뉴스에 등장하자 다른 사람에게는 다시 돌아온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성적이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실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팀 리그에서 활약을 보이자 다른 구단주나 관계자들의 격려도 이어졌다. 그는 특히 경기에 몰입할 때 특유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는 말이 가장 가슴에 다가왔다. 신대권만의 끈적끈적한 당구를 보여줬다는 자부심이 살아났다.

“연맹 시절에도 정상급 강자들이 저와 경기를 붙으면 좀 껄끄러워했어요. 평소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강자라고 해도 저하고 시합하면 승률이 50%에 불과했거든요. 저랑 붙으면 쉽게 이기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지니까 불편했던 거죠. 팀 리그를 겪으면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는 말을 듣자 예전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자부심이 생긴 것 같아요.”

고참급 선수인 신대권은 “평생 잊히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나름의 목표를 밝혔다. 올해 시즌처럼 꾸준한 성적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가 선수로서 갖춰야 할 소양 중 가장 으뜸으로 내세우는 것은 ‘인성’이다.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바르게 나타나면 관심과 호감을 품는 사람들이 늘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이 결국 신사의 스포츠인 당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과거처럼 선후배들이 이리저리 뒹굴면서 정과 의리를 쌓고 인성을 배웠던 환경과 부모님이 돌봐주는 지금의 환경은 완전히 달라서 더욱 선수들의 올바른 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