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의 첫 결실이 맺혔다. 그 결실은 10·30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이다. 문민정부이후 내내 막혀왔던 당국간 채널을 대체할 민간채널이 드디어 뚫린 것이다. 민간교류협력을 통한 북한태도변화를 유도해온 우리에게 북한이 마침내 호응한 것이다. 이로인해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은 이제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손짓하고 있다.

이번 결실은 종결을 의미하기보다는 개시를 알리는 신호로 봐야한다. 엄격히 보면 금강산 유람선이 제대로 동해항을 출발할 수 있다는 청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민간교류의 물꼬가 터진 것뿐이다. 하지만 향후 금강산관광사업등의 결과에 따라서는 이번 물꼬는 남북관계사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물꼬를 튼 북한의 태도에는 분명 범상치 않은 점이 많았다. 김정일이 국방위원장 취임이후 첫 접견 외부 VIP로 정 명예회장을 택했고 정 명예회장의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직접 찾았다. 면담에서도 김 국방위원장은 현대그룹의 경협사업에 대한 절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10월 28일 권력서열 2위 김영남과 정 회장의 회동이후 김정일면담에 회의적인 남한쪽을 비웃기나 하는듯 파격적이고도 전격적인 회동을 시도했다.

정 회장 유혹, 북한엔 가뭄의 단비

김정일이 정 명예회장의 체류일정을 늦추면서 회동을 성사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통일소 1,001마리, 밀가루 40만톤, 현대자동차 20대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경협에 대한 호의를 표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에 아무래도 무게가 실린다. 햇볕정책을 기조로 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확고한 만큼 민간교류협력사업을 최대한 이용해보자는 속셈이 작용한 것 같다. 남쪽이 포용정책기조를 상당기간 유지할 경우 경협사업을 통해 실리를 취하는 것이 합당한 대남정책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김 국방위원장은 달러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9월 5일 국방위원장에 취임함에 따라 공식적인 1인자 지위에 오른 김정일은 하루속히 주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어야 할 절박한 처지이다. 원료난으로 인한 20~40%의 공장가동률도 시급히 끌어올려야 한다. 따라서 씀씀이가 크기로 소문난 정 명예회장의 유혹은 가뭄때의 단비였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내부의 권력동향도 면담성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제난이 계속되고 광명성1호 발사이후 국제여론이 악화하자 국내 강경파의 입지가 다소 흔들리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은 최근 제네바 4자회담에서 2개 분과위 구성을 합의해주었고 16일 찰스 카트먼 미 경수로 대사의 방북을 허용, 영변지하시설물을 사찰토록 했다. 그래서 김정일이 최근 조명록 군총정치국장 등 매파들을 향해 “사고가 유연하지 못하다” 고 질책했다는 설도 나돈다.

상대적으로 북한내 온건파의 사활을 건 경협추진 노력도 10·30 면담을 이끌어냈다. 정보관계자는 “최근 북한에서는 현대와의 경협에 깨지면 사업을 추진한 세력은 동해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됐던게 사실” 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 등 북한 비둘기파는 정치적 생명을 담보한 채 정 명예회장의 일정을 하루 늦춰가면서 면담을 추진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 요건파입지 강화, 햇볕정책에 탄력

10·30 면담성공은 온건파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현대의 금강산관광사업은 노동당 외곽기구인 아태평화위가 관장하는 사업이 아니라 김 국방위원장이 직접 관장하는 사항이 됐다. 노동신문 10월 31일자 1면에 실린 정 명예회장과 김정일의 사진은 이같이 변화된 내용을 북한내부에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볼수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김정일은 그 과실 이나 책임을 분점해야 한다. 따라서 김정일은 사업 성공을 위해 온건파의 입지를 어느 정도 보장해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대북정책 측면에서 볼때 김-정 회동은 햇볕정책에 탄력을 부여할 것으로 관측된다. 햇볕론을 견제해온 국내외 보수세력의 공격은 자연 주춤할 것으로 보인다. 민간경제교류를 통한 신뢰구축조치는 더욱 활성화할 조짐이다. 정부관계자는 면담성사직후 “현대가 5월 소를 보낸다고 했을때 정부는 소가 인도지원 물품이 될 수 없어 지원이 불가능하지만 정 명예회장과 소가 판문점을 통과한다면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며 “그러나 현대가 1달간 달라붙더니 결국해내고 말았다” 며 민간교류의 장점을 강조했다. 현단계에서는 정부보다 오히려 민간부문이 남북의 벽을 훨씬 잘 뚫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부는 그러나 섣불리 민간채널에 정부의 입김을 불어넣으려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간급 교류협력을 통한 신뢰구축을 먼저 이뤄보자는 분위기다. 실제로 정 명예회장의 남북당국간의 메신저 역할을 맡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부가 내심 민간채널을 통한 당국간 채널의 복원을 꿈꾸지 않는 바는 아니다. 금강선 유람선 구조구난, 관광객 신변보장문제 등이 계기가 돼 당국간 대화 테이블이 마련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남북관계 낙관은 금물, 정경분리가 변수

순풍을 받고 있는 정부의 햇볕정책이 앞으로도 순항하리라고 낙관할수는 없다. 북한이 경협에 임하면서 철저히 당국을 배제하고 민간기업으로부터 단맛만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된 경협사업에도 당국배제라는 멍에가 벗겨지지않을 경우 정경분리원칙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우리의 정경분리원칙이 ‘북한식 정경분리’ 에 먹혀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경협과 민간교류에 따른 남북 인적교류의 활성화도 북측에 막혀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금강산 관광지와 관광코스 주변에 이미 철조망을 설치하는 등 인적접촉에 따른 사상침투에도 만반의 대책을 마련해놓고 있다. 금강산 관광개시와 동시에 김정우대외경제위원장 숙청이후 이어지고 있는 내부단속을 강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또 남북관계 특수성에 비춰 잠수함침투사건 등 돌발변수로 금강산 유람선의 지속적인 운항이 좌초의 운명을 맞을수 있는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금강산 유람선만이라도 남북 정치·군사관계의 종속변수로 전락하지 않도록 남북양측이 제도적이고 비제도적인 여건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김-정회동은 지금껏 화석화된 남북대화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은 것에 불과하다. 민간교류를 매개로 남북당국간 채널이 복원되기까지에는 지금까지의 인내 보다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

이영섭·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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