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바람'뒤의 긴 '추위'

01/28(목) 15:20

한나라당 이회창총재가 22일 정계입문 3년을 맞았다. 집권당 대표와 대선후보에서 야당총재로 자리바꿈한 그로서는, 지나간 3년이 30년 세월만큼이나 무겁고 길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한때 화려했던 영광 뒤의 참담하고 혹독한 좌절과 시련을 반추할 겨를도 없었던 것일까. 그는 이날도 거리에서 대여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정말 힘들다. 그러나 3년간 당이 격은 시련에 비하면 예상보다 적은 규모로 줄어들었다. 그동안 당이 받은 고난과 타격에 비해서 잘 견뎌왔다고 본다. 특히 작년과 연초에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잘 해냈다고 자부한다. 국민으로부터 (잃었던) 신뢰를 다시 찾아가고 있고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화려한 정계입문, 대선 패배 뒤엔 ‘찬바람’ 만

이총재가 털어놓은 정계입문 3년에 대한 소회이다. 사실 이총재만큼 짧은 기간에 뚜렷이 대비되는 정치적 명암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정치인은 드물 것같다. 정치입문기_대권도전기_야당지도자의 길로 이어지는 그의 정치적 발자취는 한마디로 ‘짧은 화려함과 긴 그림자’ 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출발은 상큼했다. 대법관 출신인 그는 중앙선관위원장과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거치면서 얻은 ‘대쪽 이미지’ 를 통해 우리 국민에게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제공, ‘예비 정치지도자’ 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급기야 96년 4·11총선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단연 정치권의 영입대상 1호가 됐고, 각 당의 강력한 흡인력에 장고를 거듭하던 그는 결국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행을 택했다.

4·11총선의 선대위의장을 맡은 그는 ‘대쪽바람’ 을 일으키며 여당의 수도권 압승을 일궈내고 자신도 전국구 1번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다음해 3월13일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입문기’ 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본격적인 대권고지 등정에 나섰다. 하지만 당내의 쟁쟁한 토박이 중진들의 견제와 반발도 만만찮았다. 97년 7월 여당 사상 최초의 자유경선을 통해 어렵사리 대선후보를 거머쥐긴 했으나, 곧이어 터져나온 아들의 병역문제 시비와 경선불복 파문 등 안팎의 공세를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정권을 내주는 쓰라림을 맛보고 말았다.

‘정권재창출 실패의 장본인’ 이라는 낙인속에 한동안 정중동하던 그는 지난해 8월말 총재경선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야당총재로서 지내온 지난 4개월여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세풍·총풍사건 등 여권의 총공세가 터져 나왔는가 하면, 정치인 사정, 소속의원의 연쇄탈당, 당내 계파및 노선갈등 크고작은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야당투사로서의 이미지 변신에 주력

이총재는 이와관련, 최근 기자들과 만나 “당원이 구속 당하고 소속의원이 체포장을 받고, 이런 희생을 쌓으면서 정치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야당의 위치를 유지하고 민주화와 정의를 부르짖어야 하는지도 고민했다” 고 말했다. 그는 또 “아우까지 구속된 마당에 우리 정치가 이렇게 가야 하는지도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던졌다” 면서 “이제 무서울 것도 꿇릴 것도 없고 내 몸을 던져서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 위해서 모든 희생과 노력을 다해서 이 나라의 앞길을 열어나갈 것이다” 라고 결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총재는 그동안 당안팎의 무수한 도전을 헤쳐나오면서 야당총재로서의 입지를 서서히 굳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내에서는 ‘재집권의 유일한 희망’ 으로 나름대로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어느정도 야성도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당내 주류측 인사들은 “여당이 (이총재를) 토벌대상으로 삼을 만큼, 잠재적으로 두려운 존재로서의 강력한 야당을 형성하고 있다” 고 주저없이 말한다.

한 측근은 “새해들어 이총재의 정치적 행보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면서 “고통이 클수록 신발끈을 더욱 조여매겠다는 표정” 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말 그동안의 이미지와 달리 ‘국회 529호 사건’ 을 진두지휘하면서 급기야 이를 정치쟁점화하는 등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고,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는 여권의 고강도 공세에도 불구하고 마산집회를 밀어붙인 대목이 대표적인 변신이라는 주장이다. 아울러 당소속 의원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협조를 당부하는가 하면, 시민단체나 원로정치인 등과의 접촉빈도를 늘여나가는 점도 변신의 일환이라고 한다.

◆순수한 ‘이회창식 정치비전’ 다져야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총재에 대한 이같은 긍정평가에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유일야당의 총재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수한 ‘이회창식 정치비전’ 에 의한 지지라기보다는 반DJ정서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영남지역과 구여당 성향의 보수층 등 반DJ세력을 겨냥한 ‘비판정치’ 에 따른 순간적인 지지도 상승이라는 분석이다.

주류측 일부 인사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여권이 이총재를 워낙 핍박하는 바람에 당내 위기감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총재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고 말했다. 마산역 규탄대회에서 ‘이회창’ 연호가 터져나오는 것은 이총재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현상황에서 “DJ의 대항마는 이총재밖에 없다” 는 소극적 지지라는 것이다. 또다른 인사는 “이총재는 3가지 조건(자금력 친화력 지역기반)을 결핍해서 야당총재로서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면서 “장기적으로 볼때 이같은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 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총재로서는 정계입문 당시 기치로 내걸었던 ‘3김정치 청산을 통한 선진정치 구축’ 이라는 슬로건이 야당총재의 길을 걸으면서 점차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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