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은 지도 1년이 지났다. 당시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두고 6·25 전쟁이래 가장 큰 역사적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국치’ ‘경제식민지’ 등 갖가지 극단적인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고 ‘IMF시대’ 라는 명칭은 아예 유치원생들에게까지 보편화됐다. 고도성장과 함께 늘 경제 우등생으로 불려져 왔던 만큼 갑작스런 낙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우리 경제에 대한 자기 반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소비 문제는 그 중심에 있었다. 외환 위기가 터지자 국민들은 과소비와 외제 선호가 나라를 부도위기에 몰아넣었다고 흥분했었다. 심지어는 외제 승용차 보유자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호소했고 금모으기는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외환위기는 금모으기나 국산품 애용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핍은 내수시장의 극심한 침체라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기업의 도산이 줄을 잇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경제는 그 기반마저 붕괴될 위기에 처해지게 됐다. 이를 계기로 유효수요창출을 위해 소비를 부추겨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합리적인 소비 또는 똑똑한 소비가 필요하다는 홍보까지 등장했다.

무조건적인 내핍, 내수시장 침체 가져와

이때부터 소비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중적인 잣대를 사용했다. 내수침체를 우려하면서도 소비가 증가할 조짐만 나타나면 IMF를 잊었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또한 내수 확충을 위해 구매력이 있는 부유층들이 소비를 늘려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들 계층의 소비행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쓰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소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불투명하다.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합리적 소비에 대해서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합리적 소비는 과연 무엇인가? 물론 정확한 정의는 없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합리적 소비를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소비행태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합리적 소비를 소비량의 적정성, 소비 행태의 계획성, 소비 목적의 내실성등 크게 3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번째 기준은 당연히 소득 수준에 비해서 소비 규모가 적정한가 하는 양적 개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저축률이 높은 우리국민은 높은 평점을 받을 수 있다. 95년 기준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35.9%로 나타나 일본의 30.8%, 대만25.6 %, 미국 16.2%를 상회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우리국민은 국제 기준으로 볼 때 소득에 비해 씀씀이가 헤픈 민족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국민들의 소비가 지나친 것처럼 보였을까. 아마도 소비의 증가 속도가 빨랐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경제는 지난 30년간 고도 성장을 유지해왔다. 또한 80년대 말부터는 두 자리수의 임금 상승률이 약 10여년간이나 지속됐다. 당연히 소비도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소비구조의 변화도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일부 품목의 소비 증가는 총소비의 증가보다 훨씬 빠르게 나타났다. 당연히 흥청망청 소지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겐세일 문화, 무계획한 소비형태로

둘째 기준은 소비의 행태가 계획성이 있는가 아니면 충동적인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은 자신의 구매력과 생활에의 필요성을 면밀히 고려하여 소비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적당히 그때그때 지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소비 행태의 대표적인 증거로 ‘바겐세일 문화’ 를 들 수 있다. 필요한 소비를 미리 계획했다가 바겐세일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사서 쓰고 바겐세일때는 계획에도 없던 것을 추가로 구입하느라고 북새통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다. 본래 환경에 잘 적응해서 산다는 의미의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산다’ 는 말이 최근에는 소비의 무계획성을 대표하는 말이 돼버렸다.

무계획하고 충동적인 소비의 단점은 지출한 만큼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최소한의 지출로 생활의 질을 극대화하기 위해 꼼꼼히 따져보지를 않으니 당연히 지출한 만큼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구입한 의류나 가전제품 등을 과연 지불한 가격만큼 제대로 사용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생산자나 유통업자들도 충동적인 소비자에게는 내실있는 제품과 철저히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겉만 멀쩡한 제품과 눈속임 마케팅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려 들 것이다. 결국 충동적인 소비행태는 피땀 흘려 번 돈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셋째 기준은 소비자가 소비 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목적의 내실성의 문제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흔히 ‘과시적’ 이라고 한다. 이는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삶의 기쁨의 중요한 부문을 차지하다 보니 대형 고급제품 그리고 비싼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겉으론 큰 차, 비싼 옷, 비싼 가구를 구비하고 속으론 빈곤한 가정문화와 생활 수준을 누리는 삶. 이것이 보이는 것을 위해 내실을 희생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자화상이다. 경제력에 비해 고급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은 이유도 바로 지나치게 외향적이고 장식적인 소비 문화에 기인한 바 크다.

충동적이고 과시적인 소비형태가 문제

우리 경제에 있어서 소비의 문제는 소득에 비해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다. 소비행태가 충동적이고 과시적이라는 것은 곧 내수시장이 불안정한 소비자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 여건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소비가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나라의 소비변화를 통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올해의 경우도 그렇다. 97년 GDP성장률과 소비증가율은 각각 5.5%, 3.5%였으나 98년 상반기 중 이들 두 변수의 성장률은 각각 -5.3%와 -11.0%를 기록하였다. 소비가 경기 변화를 완충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불황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위기극복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경제는 모든 부문에서 변화의 고통을 겪고 있다. 때로는 강제적인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소비문화의 경우는 변화시켜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규제할 수도 강제할 수도 없다. 스스로 깨닫고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국민이 이 어려운 경제적 고통속에서 계획적이고 내실있는 소비문화를 일구어낸다면 우리 경제는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 진입의 꿈을 다시 추구할 보다 든든한 기반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태열·현대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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