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가죽이 벗겨지는 법관

01/28(목) 18:38

손바닥만한 문고판 미술서적 도판으로 본 그림 한 점이 지금 번지고 있는 대전 법조비리 사건에 덧 씌워집니다.

15세기 말 벨기에지방에서 활동했던 해럴드 다비드라는 화가가 그린 ‘캄뷰세스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은 이렇습니다. 넓은 광장 한 가운데에 놓인 긴 테이블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한 남자에게 네사람이 달라붙어 가죽을 벗기고 있습니다. 그림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벌써 다 벗겨져 속 살이 시뻘겋게 드러난 왼 다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으며 몸통 한 가운데와 양 팔에도 칼자국을 따라 말려 올라간 살 가죽 사이로 핏방울이 스며 나오고 있습니다. 처형 테이블 주변과 광장 구석에서는 근엄한 옷차림의 남자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이를 꽉 물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의 흰 몸뚱아리와 벗겨진 사지에서 흐르는 피는 광장에 깔린 회색빛 타일과 집행관들의 검고 붉은 옷차림과 대비돼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맑은 날을 골라 처형을 한 듯 중세풍의 우중충한 건물사이로 살짝 보이는 푸른 하늘이 그림의 분위기를 더욱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뤼쥐의 흐로닝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직접 보았던 재일동포 문필가 서경식씨가 자신의 미술기행문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작과 비평사)’에 남긴 설명에 따르면 캄뷰세스왕은 기원전 6세기에 재위한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전제군주이고 가죽벗김을 당하는 형벌의 희생자는 시삼네스라는 판사입니다.

시삼네스 판사가 왜 이렇게 끔찍한 처벌을 받게 됐는 지는 서씨도 잘 모르는

듯 구체적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씨에 따르면 미술관에서 팔고 있는 카탈로그의 해설에는 1498년 브뤼쥐 시당국이 ‘무시무시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판사와 시 공무원들이 영원히 타락·부패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대의 사실적 묘사화가였던 해럴드 다비드에게 이 그림을 주문, 시청 회의실에 걸어두도록 했다’고 나와있다고 합니다. 이 해설로 유추하면, 시삼네스는 타락 혹은 부패한 판사이며, 불공정한 판결을 내린 것이 드러나 왕으로부터 가죽을 벗기는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인 캄뷰세스 왕의 재판이 있었던 것은 기원전 6세기, 지금부터 2,500년전이고 캄뷰세스 왕의 재판을 브뤼지 시당국이 교훈을 삼으려 했던 것은 500년 전입니다. 예전에도 부패한 법관이 있었지만, 부패한 법관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한 처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의 사법제도가 우리보다 발전했다함은 이같은 엄한 단죄와 이를 교훈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 의정부에 이어 또 다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대전 법조비리 사건에 부패한 법관을 단죄하는 ‘캄뷰시스 왕의 재판’이 오버랩되는 것을 저로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그림이 판사만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검사나 변호사는 캄뷰시스 왕의 재판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전의 사법제도가 지금처럼 법조인의 직역을 엄격히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뤼쥐 시당국도 판사등 공직자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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