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개편 "어디까지 왔나"

02/02(화) 18:13

정계 개편의 실체는 있나, 없나. 뚜렷하게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풍설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합당론도 있고, 동서화합형 정계개편론, 제2야당 출현론도 나온다. 한나라당은 “말만 있고 실체는 없는 허공에 그리는 그림” 이라고 폄하하면서도 ‘만약’ 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권의 핵심부도 “정계개편이 어디 쉬운 일이냐” 고 조심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정계개편 시도가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모색도 있었고 깊숙한 대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시도만 되다가 중도하차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불안정한 정국구도가 지속되는한 정계개편은 항상 ‘현재진행형’ 이 될 수 있다. 현재 실천적 수준에서 모색되는 정계개편은 ‘동서화합형’ 이다. 오래전부터 여야의 두 중진은 비밀리에 회동, 깊숙한 거래를 해왔다. 정치권에서는 두 중진이 나눈 대화의 편린들이 하나 둘 흘러나오고 있다.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있는 여권 중진 A의원과 야권 거물 B의원이 나눈 대화를 모자이크해보면, 정계개편의 흐름을 어느정도 꿰맞춰볼 수 있다.

◆물밑접촉 계속, 철저한 보안 속 ‘일부 노출’

A/ “한나라당 이회창총재가 융통성없는 줄 알지만 해도 너무한다. 극단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있으니…”

B/ “세풍 수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겠느냐. 비주류의 도전도 미리 눌러야하는만큼 당을 전시체제로 만드는 것 같다.”

A/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생존을 도모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 정권의 기반을 뒤흔들어 조기 레임덕을 촉발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는듯하다.”

B/ “감정적으로는 그런 측면도 있겠지. 어쨌든 더이상 지역주의의 심화가 있어서는 곤란하다.”

A/ “정치권이 지금처럼 퇴로없는 투쟁국면에 매몰돼 있어서는 안된다. 야당내에도 다른 목소리가 있지않느냐. 당신이 그 세력을 모아 여권과 힘을 합쳐 동서화합의 정치를 멋있게 해보자.”

B/ “정치 현실상 야당의 반이회창세력이 여권과 합치려한다면 그날로 사꾸라 소리를 듣게된다. 그렇게되면 야당의 이탈세력도, 여권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한나라당에서 독자적인 세력이 떨어져나와 제2의 야당을 만들어 2여2야체제가 돼야한다. 사안별로 비판하고 경쟁하며 협조하는 건전한 여야관계의 구축이 정계개편의 바람직한 방향이다.”

A/ “좋다. 2여2야의 4당체제를 운영하다가 정치판 전체를 새로 짜야할 필요가 생기면 다시 논의해보자. 언제나 가능하겠는가.”

B/ “여야가 험악한 대립국면에 있는 지금은 어렵다. 그러나 동조세력이 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막후 대화를 하면 2월말이나 3월초에는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

이런 물밑접촉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계속됐다. 워낙 보안에 철저했기에 상당기간 이들의 논의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모색되고 있다는 방증들이 드러났고 급기야 보도를 통해 그 일부가 노출됐다.

◆ 한나라당, ‘왕따작전’ 펼치며 이탈방지에 주력

당장 한나라당의 방어가 시작됐다. 이른바 ‘왕따작전’ 으로 이탈세력을 배신자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동서화합형 정계개편의 주대상인 대구·경북지역 의원들을 집중 공략했다. 대구·경북은 부산·경남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현 정부에 비호의적인 영남정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어 이 지역의원들이 이탈을 택하기는 쉽지않은 현실이다. 이런 지역정서 때문에 TK의원들은 외형상 일단 이총재 등 지도부의 설득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게 옳지않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가기도 쉽지않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한 다음 총선에서 지역감정의 여세에 힘입어 당선되기가 더 쉬울 것 같다” 는 게 TK의원들의 솔직한 심경토로였다.

TK의원들의 주저는 새로운 길을 암중모색중인 한나라당 비주류 중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1월30일 이루어진 김윤환전부총재와 이한동전부총재의 회동도 그랬다. 두 중진은 정계개편의 동조기류가 표면화했다면 당연히 이날 회동에서 신당추진을 화두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회동후 흘러나온 얘기로는 신당추진에는 이견, 당내 리더십 도전에는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김전부총재는 신당추진에 더 무게를 실었고 이전부총재는 일단 집단지도체제를 도입, 당내 민주화를 이루자는 의견을 냈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정계개편의 실현여부는 지금부터가 관건이다. 표면의 기류대로 한나라당의 이탈세력이 몇 사람이 되지않을 경우 대규모 정계개편은 불가능해진다. 반면 이면의 동조세력이 한 자리수를 넘는다면, 정계개편은 새로운 판짜기를 향해 급격하게 진전될 것이다.

사실 여권은 큰 틀의 정계개편을 구상해왔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안정적 집권세력의 구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정치현실이 그리 녹록치않았다. 과거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수, 협박의 수단을 적게 쓴 탓에 야당의원 영입을 통한 여당 다수의석 확보가 지리할 정도로 오래 걸렸다. 그 연장선상에서 큰 틀의 정계개편도 여권 기대와는 달리 실현되기에는 너무 많은 난제들이 가로막고있다.

정계개편 구상과 현실의 편차는 역설적으로 여권에 ‘부메랑’ 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계개편의 말만 무성하고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권력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년 정국의 화두로 던져진 화합의 정계개편이 또다시 공염불에 그친다면, 여권의 정국주도력은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위기의식이 있기에 여권의 의지는 남다를 수 있고, 그런만큼 과거와는 달리 정계개편의 실현가능성은 높다는 역설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한달, 2월 정국의 후반과 3월 정국의 초반은 정치권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촉각을 세우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영성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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