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원이라도 받으면 '보따리'

02/02(화) 17:42

“매일매일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다”

잇따른 고위간부의 구속으로 취임 7개월만에 최대위기를 맞은 고건서울시장의 요즘 심경을 이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듯하다. “급히 찾은 국장이 자리에 없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더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서울시에서는 지난해 10월 이후 석달새 김광시정책기획관, 조성두서울산업진흥재단대표, 김순직행정관리국장, 박경영공원녹지관리사업소장 등 고위간부만 4명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선 구청 중·하위직들의 비리도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고 있다.

때만 되면 무더기로 불거지는 서울시 공무원의 비리사건은 이제 듣기에도 식상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복마전(伏魔殿)’이란 오명을 수십년째 달고 다닐까마는,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이골이 난 시 공무원들에게도 이번 사태는 과거 여느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던지고 있다.

◆‘부패와의 마지막 전쟁’ 선포

일련의 사건들이 고시장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이른바 ‘비리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6급 주사 이재오씨의 200억원대 축재 사건 이후 고시장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이 전쟁에는 징계 3진아웃제, 모든 민원인에 시장이 직접 받는 비리신고엽서 발송, 5대 부조리취약분야 5급 이하 직원 4,700여명 전보인사 등 각종 신형 ‘중화기(重火器)’가 대거 동원됐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하기만 하다.

그중에서도 40대 초반에 수석국장에 올라 이 전쟁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해온 김 전국장과 지난해 11월 피튀는 전장 한복판에서 버젓이 돈을 받아챙긴 것으로 드러난 박전소장의 잇따른 구속은 고시장을 향한 ‘직격탄’이었다.

고시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재빨리 읽은 듯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25일 서기관급이상 간부 250여명을 참석시킨 가운데 연 비리척결 대책회의에서 그는 “앞으로 단돈 10원이라도 뇌물을 받는 간부직 공무원은 적발 즉시 공직에서 영원히 추방시키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고시장은 이날 내내 “부패와의 마지막 전쟁”의 전선(戰線)을 1단계 중·하위직에서 고위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2단계로 전면 확대하겠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한 치의 후퇴도 없이 부패와의 전면 전쟁을 강도높게 추진하겠다”는 등 전투적인 용어를 동원한 “비장한 각오”들을 쏟아냈다.

고시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이라는 수식어를 더 얹은 ‘전면전쟁’에 걸맞게 새로운 ‘첨단’무기들을 내놓았다. ‘이권업무 온라인 공개처리 제도’와 ‘비리를 낳는 민원관련 규제 혁파’가 그것이다.

◆온라인 제도 도입으로 투명한 만원처리

우선 온라인 공개처리 제도는 재개발, 용도변경, 토지형질변경 등 부조리 발생 소지가 있는 민원 처리과정을 인터넷을 통해 모두 공개해 민원행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것. 또 25개 자치구와 연결된 내부행정전산망에 띄워 시장단과 해당업무관련 국·과장, 감사관실 등에서 업무처리 전과정을 24시간 관리, 감독하도록 해 부조리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공개행정의 위력을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라고 비유한 벤자민 플랭클린의 말을 인용해 밝힌 고시장의 계획대로라면 3월말부터 민원 당사자는 물론, 모든 시민들이 서울시의 민원행정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고시장은 이와함께 “비리를 부르는 과도한 규제, 민원관련 업무에 대한 규제는 일부 부작용을 감내하더라도 과감히 혁파하겠다”고 밝혔다. 규제완화·폐지는 정부 각 부처에서 예외없이 추진하고 있는 사안이지만, 서울시가 내놓은 대책들은 그야말로 혁명적이다.

먼저 위생분야를 보자. 김재종보건복지국장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규제를 만들어놓고 지키라고 하니 처벌받지 않기 위해 돈을 주는 것이 관행화했다”면서 주로 위생분야 공무원의 ‘밥줄’인 단란주점 문제를 거론했다. ▲조명밝기 30룩스이상 ▲면적 150㎡미만 ▲객실입구 투명유리 설치 ▲특수조명시설 금지 등 단란주점에 관한 각종 시설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국장은 “술 마시고 기분도 내려 단란주점에 가는 것인데 훤히 들여다보는 방안에서 누가 흥이 나겠느냐”면서 “이런 현실을 무시한 규제는 모두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는 한발 더나가 단란주점을 유흥주점으로 흡수통합, 이미 관행화한 접대부고용을 허용하는 대신 상업·준주거지역에만 허용함으로써 단속을 둘러싼 뇌물수수를 원천봉쇄할 것을 제안했다.

◆뇌물 부르는 ‘억지규제’ 철폐, 부작용 우려도

주택·건축분야와 관련, 양갑주택국장도 “수많은 감사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부조리가 근절되지 않는 주원인은 규제 위주의 복잡하고 지키기 어려운 규정과 절차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따라 옥탑 불법용도변경 등에 대해 위반면적 시가표준액의 3배의 과태료를 물려 준공처리해주는 위법건축물 양성화제도를 도입하고, 3층이하로 제한된 다가구주택도 주상복합인 경우 4층이상 허용하겠다는 등 획기적인 규제완화책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공개행정 천명은 환영할 일이지만, 규제개혁 부분에서는 법 개정을 담당한 관련부처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다 여론의 반대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단란주점 문제와 관련해 김재종 국장도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부정부패냐, 퇴폐냐의 문제”라고 밝혔듯이, 서울시가 내놓은 규제폐지안들은 결과적으로 접대부고용업소 난립 등 많은 부작용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위법건축물 양성화 문제도 “돈 있는 사람은 과태료만 물면 위법을 저질러도된다는 얘기냐”는 건설교통부 관계자의 지적처럼, ‘법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근본원리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김종익 사무국장은 “쾌적한 도시환경 조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상의 규제까지 마구잡이로 풀 경우 그 피해는 결국 시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함께 ‘마지막 전쟁’을 섣불리 선언하고, 각종 대책을 폭탄투하하듯 쏟아놓은 고시장의 ‘속전속결식 전술’도 문제다. 고시장이 “누적된 병폐의 토양을 갈아엎는 사회적 객토(客土)작업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는 혁신운동”이라고 밝혔듯이 부정부패 척결은 ‘장기전’이기 때문이다.

“장기전에는 주도면밀한 전략과 함께 병사의 사기도 챙기는 용병술이 요구된다. 그동안 숱한 비리와의 전쟁이 실패했던 것도 몰아붙이기 전술로 사기저하와 복지부동이 만연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식의 악순환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한 직원의 말에 고시장은 귀기울여야 한다.

이희정·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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