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 의장 "경제문제는 손대지 마시오"

02/04(목) 11:34

‘미국의 명실상부한 경제 대통령은 그린스펀이다.’

이는 최근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이 최근 사회보장기금의 주식투자 문제로 한바탕 설전(舌戰)을 벌인 후 세계 유수 언론들이 꼽은 제목이다.

그린스펀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음으로 해서 대통령이 성추문에 시달리는 웃지못할 상황에서도 미국 경제가 큰 탈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클린턴은 지난 19일 국정연설에서 이미지 개선의 일환으로 선심성 공약을 내놓았다. 재정흑자분에서 대규모 사회보장 기금을 확보, 2조8,000억 달러를 향후 15년간 증시에 투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클린턴 선심성 공약 정면으로 반박

이 공약이 발표된 후 클린턴에 대한 지지도는 급등했다. 특히 사회보장기금 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80%에 육박했다. 최근 노령자 인구의 급증으로 연금이 30년내에 바닥날 것으로 우려해왔던 미국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증시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될 경우 강력한 주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주가상승으로 사회보장기금도 더욱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주장했다. 이전까진 특수채권에만 사회보장기금을 투자, 연간 2~2.5%에 불과한 낮은 수익률을 올렸으나 증시투자에 나설 경우 상당한 수익률을 얻을 수 있어 서민들에 대한 복지 혜택이 증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면 미국의 ‘경제 대통령’ 인 그린스펀 FRB 의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린스펀은 20일 열린 미 하원 청문회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밝힌 사회보장기금의 주식투자 계획은 민간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정치적 개입의 여지가 있어 기업의 효율성과 경제적 번영을 침해할 수 있다” 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 논리가 경제 위에 군림할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정에 여유가 있다고 다 써버리면 향후 경제가 어려워질 때 정부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주장이다. 우선 사회복지에 쓰고 남은 돈으로 정부 빚을 갚아 나중에 대비해야 한다는 원칙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린스펀은 한국의 중앙은행을 움직이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 비교할 수 있는 FRB의 수장으로 시장경제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는 인물이다.

대통령과 중앙은행 총재가 경제정책을 두고 이견을 보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경제정책의 이견이 심각한 정국혼란이나 위기로 해석되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시장과 재계의 믿음 확고, 11년 장수

얼핏 항명(抗命)에 가까운 그린스펀의 행동이 별탈없이 넘어가는 이유는 그에 대한 시장과 재계의 믿음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린스펀은 98년에 세계적인 경제 일간지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불길을 적절한 금리인하로 잡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96년에는 미 경제전문잡지 포천이 미국의 대표적 기업체 사장(CEO)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그린스펀의 지지율은 무려 96%에 달했다.

그린스펀은 원래 공화당쪽 사람으로 제럴드 포드 행정부 당시 74~77년 백악관 경제자문협의회 의장,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인 81~83년에 백악관 사회보장개혁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시인 87년 FRB 이사가 된후 88년에 FRB의장으로 지명됐다. 그는 96년에 대선을 앞둔 클린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인하하지 않고 고금리 체제를 유지했던 소신파다.

그린스펀이 ‘태생적 한계’ 를 넘어 4년 임기의 FRB 의장직을 거듭 연임하며 11년간 장수하는 비결은 그의 경제적 소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미국의 호황기조를 21세기까지 끌고가겠다는 지상목표를 확고히 세워두고 있다. 어떠한 정치적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경제의 건전성을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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