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표절’의 의미는.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럼 패러디는 뭐고 리메이크는 뭔가. 우연히 다른 작품과 일치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상품이 인기를 끌면 금방 경쟁사에서 비슷한 것을 내놓는 것과는 뭐가 다른가. 알려지지 않는 다른 작품을 몰래 베끼고는 “난 그런 영화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 어쩔텐가.

이렇게 저렇게 보면 영화에 ‘표절’은 없다. 영화란 상품은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똑같은 것이란 없다. 장소가 다르고 배우가 다르다. 그런데 영화는 또한 예술이 아닌가. 창작행위가 아닌가. 창작이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에 ‘표절’은 분명 있다.

이 혼란을 막아줄 장치는 없다. 오직 ‘양심’만이 그것을 구분해 준다. 그 양심이 문제다. 강우석 감독의 출세작은 ‘투캅스’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들며 프랑스의 ‘마이 뉴 파트너’의 한국판이라고 떳떳하게 밝혔다. 이진석의 ‘체인지’는 아예 일본 시나리오 판권을 사서 만들었다. 그 반대도 있다.

강정수의 ‘리허설’은 외국영화를 거의 그대로 베끼면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학생부군신위’와‘접속’도 모방시비에 휘말렸다. 비슷한 일본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라며 그들은 완강히 손을 저었다. 그러면 그만이다. 진실은 그들만이 알 뿐.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운파상을 받은 홍형숙의 다큐멘터리‘본명선언’이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표절을 주장하는 쪽은 교포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이 필름이 재일동포 양영희씨의 작품‘흔들리는 마음’의 내용 일부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9분41초나. 그러나 ‘본명선언’의 홍형숙씨는 이를 부인했다. 그 근거는 이렇다. 미리 양씨의 양해를 구했으며, 70분에서 인용한 것은 10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작품 도입부에 나레이션과 화면으로 양씨를 소개했다. 그리고 엔딩크레딧에 ‘8㎜ 취재 양영희’라고 넣었다.

홍형숙씨는 문제가 되자 그 부분을 잘라내 버렸다. 그나마 본인(양영자씨)의 요청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그리고는 하루가 멀다하고 ‘본명선언’은 좋은 작품이라는 글을 내고 있다.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제 심사위원들. 맞장구를 쳤다. 취재장소와 인물의 부분적 동일함이 곧‘표절’로 이해될 수 없다며 그 부분을 빼고도 ‘본명선언’은 수상작으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이름을 밝혔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으니. 그러나 어디에도 양씨의 작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8㎜ 취재 양영희’와 ‘양영희씨의 작품, 흔들리는 마음’의 차이를 모를 바보는 없다. ‘본명선언’은 양영희씨를 제작진의 한 명으로 취급했을 뿐, 그의 작품에 대해 ‘본명선언’을 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표절의 문제’보다 더 슬픈 일이다. 홍형숙씨는 많은 후배를 거느린 서울영상집단의 대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영화인들은 그의 주장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그의 양심을 보고 싶어한다.

이대현·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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