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0월에 이어 세번째로 평양행에 오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종전과는 다른 부담을 느끼면서 판문점을 통과했다. 앞의 두차례가 북한쪽이 설치한 장애물을 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방북에서는 우리 정부가 제기한 난제의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명예회장이 3차 방북에 나서는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 정부쪽에서 고개를 드는 금강산사업 속도조절론이라 할 수 있다.

유람선 관광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현대는 현재 다급한 처지로 몰리고 있다. 정부는 이달초 호텔신축, 관광상품의 다양화, 레저시설건설 등을 포괄하는 금강산 개발사업의 승인에 앞서 현대에 북측과의 추가 협상을 요구했다. 정부는 12월 2일 현대의 개발사업 승인신청서류를 반려하면서 “개발사업의 독점권을 계약서에 명시하고 사업기간을 특정해야 승인이 가능하다” 고 통보했다. 즉 현대가 북측과의 협상을 통해 계약변경 승낙을 얻거나 기존 계약서를 보충하는 별도 보증서를 받아내라는 것. 이를 성사시켜야만 현대는 북한에게 약속한 9억4,200만달러를 송금할 수 있다.

현대, 유람선 관광에 영향 미칠까 ‘전전긍긍’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위해 현대는 2~4일 베이징으로 현대 대북사업단 우시언 이사를 급파, 북측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북한 아태평화위는 “기존 계약서에 ‘금강산관광사업지역에서 리용권과 관광사업권은 장기간 현대측에게만 주는 것’ 이라고 명시한 만큼 사실상 독점권을 인정한 것” 이라고 일축했다. ‘장기간’ 이라는 사업기간에 대해서도 “9억4,200만달러가 지급되는 2005년까지 사업을 보장하고 추후 사업기간은 그때가서 정하기로 한 만큼 기간을 특정할 필요없다” 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으로서는 독점권명시 등의 요구는 내키지 않는 대목이다. 북측은 김일성 북한 주석 생존당시인 90년 통일그룹에게 금강산관광을 허용한 만큼 통일의 금강산 당일관광을 유훈사업으로 간주, 독점권을 선뜻 약속할 입장이 못된다. 독점사업 기간의 명시에 대해서는 9억4,200만달러를 모두 받는 2005년이후에야 생각해볼 문제라고 보는 듯하다.

현대의 진짜 고민은 추가 협상 난항이 11월 18일 개시된 유람선관광에 마저 악영향을 끼칠수 있다는데에 있다. 현대는 10·30 김정일-정명예회장 면담이후 관광이 성사된 다음달인 이달부터 첫 인도금 2,500만달러를 시작으로 63개월간 9억4,200만달러를 건네기로 합의했었다. 목돈을 학수고대하는 북한은 정부의 추가요구로 송금여부가 불투명해짐에 따라 이를 계약파기로 간주, 관광사업마저 해코지할 수 있게 됐다. 물론 현대는 개발사업과는 별개로 정부로부터 관광사업을 승인받은 상태여서 유람선이 장전항에 닿을때마다 관광객 1인당 300달러(11월) 또는 200달러(12월 4일부터)의 입산료를 꼬박꼬박 북측에 지불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천신만고끝에 유람선을 띄운 정부는 왜 예상할수 있는 역풍을 감수하면서 추가협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일까. 통일부 당국자는 “독점권및 독점사업기간의 명시도 따내지 못하면서 천문학적 거액을 북한에 송금한다면 국민들이 납득할수 있겠는가” 라고 설명했다. 송금된 달러가 군사비로 전용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업조건마저 확실히 못박지못할 경우 부정적인 여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속도조절론은 단순히 국민정서에 기초해서 나온 자연스런 수순이라는 설명이다.

금창리 핵의혹 등 외부요인도 ‘속도조절’ 일조

그러나 이같은 답변이 전후좌우의 모든 정황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정경분리를 되뇌이며 실사구시 접근에 따른 관광성사를 대내외에 과시해온 정부가 국민정서만을 이유로 제동을 걸고 있다는 설명은 어딘지 궁색하다. 그래서 최근 평남 대관군 금창리 핵의혹 지하시설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 대북정책을 재검토중인 미국의 유동적인 태도등의 외생변수들도 속도조절론에 일조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의 또 다른 당국자는 “금강산 개발사업의 속도조절론은 외적 변수에 의해 제기됐다고 말할 수 없지만 외적변수를 고려해 해석하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며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사실 금창리 핵의혹이 말끔히 가시기 전에 달러가 북한으로 건너갈 경우 식량원조를 지렛대로 활용중인 미국의 협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 미국이 3,500만달러 상당의 중유 50만톤 지원을 조건으로 북측에 제네바 합의의 준수를 요구하는 상황도 무망해질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이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와중에 우리가 독자적으로 9억달러라는 메가톤급 ‘당근’ 을 북에 건네는 문제에 관해 좀더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도 속도조절론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창리 핵의혹이 사라지고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완료될때까지 금강산 개발사업의 승인은 연기돼야만 한다는 결론은 합당하지 않은 것 같다. 정명예회장이 평양에서 만족스런 대답을 받아올 경우 정경분리를 강조해온 정부는 미국의 대북정책과는 별개로 승인문제를 고려해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내외적인 모든 요소들을 감안해볼때 정부의 개발사업 승인은 우리의 정경분리원칙이라는 좌표와 미국의 대북정책 좌표가 만나거나 또는 근접하는 지점에서 이뤄질 공산이 높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7일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 조정관과 만나 북-미간 일괄타결을 강조한 데에는 이같은 맥락도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북측에 제시할 ‘카드’ 마땅치 않은 정회장

한편 2박 3일간 평양에서 머무를 정명예회장은 북한에 제시할 카드가 마땅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측이 계약변경을 수용할 경우 별도의 ‘선물’ 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럴 경우 현대는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관계자들도 “이번 방북은 금강산 사업을 다지고 여타 경협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 이뤄진것” 이라는 모호한 말로 이같은 사정을 시사해준다. 그래서인지 연불수출형식으로 북한으로 넘어간 승용차 50대는 송금이 불투명해진데 대한 ‘사과’ 선물이 아니냐는 짓궂은 지적마저 나온다. 그러나 한푼의 달러가 아쉬운 북한이 별다른 반대급부 요구없이 계약변경을 수용할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아울러 3차 방북에서는 육상루트를 통한 금강산 관광, 금강산 개발지역의 확장, 백두산 칠보산 묘향산등지의 개발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보여 그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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