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때면 늘 동그란 의자를 들고 다니며 환자옆에 짝 다가앉아 환자들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이던 다감한 의사. 연세의료원 심장내과 과장을 거쳐 이 병원 혈관 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으며 ‘풍선확장술’국내 최초 시술등 우리나라 최고의 심장내과 의사였던 이웅구 박사(58). 그러나 그는 이제 우리에게 잊혀진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를 떠올리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무려 만 5년간 병원침대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기 때문이다. 의료비가 월 500만원이 넘는, 현대의학의 힘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할아버지, ‘아’하고 입 좀 벌려 보세요.”

3일 안산 한도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박지향씨는‘선생님’이웅구 박사를 할아버지라 부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알 없는’굵은 검은테 안경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꼬집으면 약간 움직일 뿐 멀뚱멀뚱 초점없이 움직이는 눈이 살아있음을 알게 해주지만 의식을 갖고 눈을 맞추는 것은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가 이곳 병원으로 옮긴 것은 올 6월9일. 94년 1월 뇌출혈로 쓰러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이후 거의 만 5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들을 그는 이런 상태로 신촌세브란스병원- 한마음병원- 어머님 양순담씨 집을 옮겨다니다 학교 후배 최종현씨가 운영하는 한도병원으로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의 몸엔 여기 저기 많은 구멍이 뚫려있고 이 구멍은 줄로 연결돼있다. 위엔 특수유동식 삽입을 위한 위줄, 요로엔 소변배설을 위한 소변줄, 목에는 가래도 뽑고 숨쉬기를 도와주기 위한 가는 줄이 몸과 연결돼있다. 식사도 용변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어 간호사가 이러한 줄을 통해 인위적으로 음식물도 삽입하고 관장도 해주는 것이다. 이박사가 살아있는 표시로 유일하게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숨쉬는 일뿐. 사실 이것도 명백하게 따지면 혼자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기관지를 절개, 여기에 호스를 연결시켜 숨을 쉬고 가래를 뽑아내고 있어, 이 장치만 제거한다면 숨쉬는 일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

“어떤 이유로 오빠가 살아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숨만 쉬는 고기덩어리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가족들 입장에서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오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동생 이리자씨는 이박사에게 5년은 정지된 시간과도 같았지만, 사실 그의 가족들에겐 극심한 고통의 세월이었다도 말했다.

동생들의 돈까지 모두 빌어 병원 개원 준비를 했던 이박사가 쓰러진 후 형제들은 병원 동업자의 잠적, 병원 폐업등 연이은 불행으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어야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어머니 양순담씨(84·전 걸스카우트 총재, 아버지는 작고)는 아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거의 매일같이 병원을 찾으며 3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극한 간호를 쏟았다. 사향을 먹이는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며 아들이 깨어나기를 기원했던 양씨는 결국 2년전 자신마저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더이상 이박사를 병문안 갈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이박사가 쓰러지기전 이혼한 미국인 부인과 자식들과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가족들, 그리고 이젠 후배의 지극한 간호속에 5년의 식물인간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박사의 혈색은 불그스레해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좋다.

그러나 최원장은 이박사가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중환자실에서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앞으로 식물인간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박사의 상태는 호전될 가망도 없고 그렇다고 악화될 상황도 아닙니다.”

안정된 상태에서 다시 뇌혈관이 터질 가능성도 없을 터이고, 요로감염이나 욕창등이 원인이 돼 사망할 수 있겠지만 워낙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있어 감염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글쎄요. 환자 간호만 잘 한다면 몇십년 이런 상태로 계속 돼, 인간 수명을 다할 수도 있겠지요.”경기중고와 연세대의대 후배이자 제자였다는 인연만으로, 월500만원(의료보험조합에서 이중 절반 부담)이나 되는 엄청난 치료비를 아무 대가없이 쏟고있는 최종현원장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식물인간 6년만에 깨어났던 전용기씨의 그후

식물인간 상태를 가족들이 포기하지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드문 예지만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 의식을 찾았던 국내 최고 기록은 전용기씨(41). 교통사고로 두개골 골절과 뇌출혈로 의식을 잃었던 그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무려 6년동안 말한마디 못하고 지내다 94년10월 아내의 극진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이라도 하듯 망각의 세월을 떨치고 깨어나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다.

그러나 현재 전씨의 건강 상태는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전주예수병원 간호사 유정애씨에 따르면 물론 전씨가 의식이 돌아왔으므로, 식물인간 상태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이지만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사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어 식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송영주·주간한국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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