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무섭다?

04/28(수) 08:22

지난 12일. 일부 신문에 자그맣게 거론되고 만 중요한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아니 벌어졌다기보다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상 올해 4월12일까지 16대 총선(2000년 4월13일)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안을 국회의장에게 제출하도록 돼 있는데 국회가 이를 위반한 것이다. 이 위반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의 위법행위.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일이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대체 국회의원들은 뭘 하고 있었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각 부문 구조조정 차원에서 정치개혁 논의는 무성했지만 출범 15개월이 되도록 정치 부문개혁은 전혀 이루어진 것이 없다. 지난해 12월초 발족한 국회 ‘정치구조개혁입법특위’도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

특히 정치개혁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제도에 관해서는 국민회의, 자민련, 한나라당이 논란만 벌이고 있을 뿐 명확한 안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좋게 말해줘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격이고 심하게 말하면 당리당략과 의원 개인의 유·불리 계산에 사로잡혀 꼼짝할 생각을 않고 있는 셈이다. 소선거구냐 중선거구냐 중·대선거구냐 하는 선거구제에 대해서는 각 당이 왔다갔다만 거듭하고 있는 형국이고 비례대표제에 대해서는 국민회의가 그나마 이른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내놓은 정도다. 자민련은 아예 이렇다 할 안이 없고, 한나라당은 “먼저 대통령제를 할 지 내각제를 할 지부터 여당이 제시하라”며 아무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다.

반면 시민단체들은 진작부터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치개혁시민연대(대표 손봉숙), 서울YMCA, 한국노총, 녹색연합 등 37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이 단체는 선거제도 개혁안을 국회에 입법 청원한 것은 물론 최근에는 “정치권의 자정능력에 한계가 드러난 만큼 국민의 뜻을 올바로 반영하는 정치개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이에 전면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며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정치개혁위원회’를 구성해 정치개혁법안을 마련하자”고 촉구하고 나섰다.

참여연대도 자체 정치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시민사회 단체가 주장하는 정치제도 개혁중 핵심은 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 국민회의의 당론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대한 대안이다.

국민회의 안은 국회의원수를 현재의 299명(지역구 253명, 전국구 46명)에서 50명 정도 줄여 250명으로 하되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은 1대1로 해서 지역구와 전국구가 125명씩 되도록 하고 있다. 지역구 의원은 소선거구(또는 중선거구)제로 선출하고 비례대표 의원은 정당득표율에 따라 선출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와 지지 정당에 두 번 투표하는 ‘1인 2투표제’방식이다. 여기까지는 독일식 비례대표제와 거의 같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당 득표를 서울권, 부산·울산·경남권, 대구·경북권, 인천·경기권, 광주·전남·전북·제주권, 대전·강원·충북·충남권 등 6개 권역으로 나눠 계산해 비례대표 의원을 배정한다는 것이다.

정치개혁의 기본논리는 고비용 저효율 정치구조를 해체하고 지역감정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회의식 권역별 정당명부제로 할 경우 지역감정이 해소되기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시민단체들은 한결같이 이 제도가 지역감정을 심화하면서 여당(국민회의)의 의석수를 최대화하고 영남지역에서 일부 의석을 확보, 전국 정당의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노린 기이한 제도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진보정당 창당을 준비중인 ‘국민승리 21’이 이 제도와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적용해 15대총선(95년 5월) 결과를 재정리한 내역을 보면 국민회의의 노림수는 분명히 드러난다.

독일식을 적용하면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은 84석, 야당인 국민회의는 62석인 반면 국민회의식을 적용하면 한나라당은 101석, 국민회의는 64석이다. 말하자면 국민회의식은 여당의 의석을 엄청나게 늘려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국민회의식이 일본식 권역별 정당명부제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는 데서 원론적으로 확인된다.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는 지역구 300명에 비례대표 200명, 후보자와 정당에 투표하되 정당득표율을 전국 단위가 아니라 몇개의 광역권역에 따라 배분한다. 국민승리 21 김두수 기획국장은 “이 제도 하에서 치른 지난 총선 결과 집권 자민당은 정당 지지율이 38%에 불과한데도 의석수는 전체의 50%가 훨씬 넘는다”며 “일본식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삼척동자가 봐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제정 당시부터 여당의 의석 독식 의도가 담긴 것이라는 점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식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이 1대1이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와 지지 정당에 표를 행사한다. 1인 2표제다. 지역구 당선자를 배정한 뒤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을 확정한다. 물론 비례대표는 정당이 투표시 제시한 후보 명단 순서에 따라 전국 단위로 배정한다. 나중에 의원 사망 등 보궐 선거구가 생겼을 때는 이 명단에 따라 차순위자를 배정하므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걸핏하면 치러야 하는 재·보궐선거도 필요없다.

독일 총리를 연속 16년간이나 지낸 헬무트 콜은 98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패해 물러날 때까지 4회 의원에 당선됐지만 함부르크 지역구에서는 95년 총선때 당선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현재의 한국 선거제도나 국민회의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서 선거에 나섰다면 결코 독일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쉽게 한다거나 사표 방지 효과라는 면에서 독일식의 장점은 학계에서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인만큼 제주도나 강원도에서 나온 한 표와 서울에서 나온 한 표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득표율만을 가지고 경상도 지역 비례대표를 뽑는 제도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세계에 유례가 없다.

정치개혁시민연대 김석수 사무처장은 “국민회의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지역주의 해결과는 무관하다”며 “정당별 지역 독식을 막기 위해 특정 정당이 한 권역에서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한 단서조항도 첫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나오는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이 언제까지나 정치개혁을 원칙없이 자기세력 불리기에 유리한 쪽으로만 끌고가려는지 국민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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