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한번 무너져보니까 세상이 보이더군요"

04/27(화) 18:04

의외로, 한 번 성공하기는 쉽다. 한 번 실패하기는 더 쉽다. 그러나 두 번 일어서기는 어렵다. 정말 어렵다.

신창원만큼이나 바쁘게 94년 한해동안 경찰을 피해다니던 사람이 있다. 빚쟁이도 단체로 몰려들었다. 서류상 붙은 형사소송건수만 열한가지. 기록된 채무액만 1억5,000만원이었다. 밤낮으로 빚쟁이며 신용카드사 직원의 독촉전화가 빗발쳤고, 한때 집안에 갇힌채 밤새 사채업자의 협박과 공갈도 받았다.

그후 5년이 흐른 지금, 그는 ‘교수 자리도 바빠서 고사한’ 성공한 사장님이다. 교통위반이 아니면 경찰에 신경쓸 일도 없고, 도처에 ‘내 돈 빌려쓰라’는 물주들이 상시 대기중. 그러나 사람이 달라졌다.

“한 번 그렇게 처절하게 무너지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다시는 예전처럼 겁없이 사는 일은 없을겁니다. 아무리 사업이 잘 돼도 늘 비상시에 대비하는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워낙 통이 커서 제품 1만개를 주문받으면 더 팔릴 것을 예상해 아예 1만3,000개를 만드는게 예전의 저였는데, 이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습니다. 1만개면 딱 1만개만 정확히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보면 사람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동진코스콤 대표 차동진(37)씨. 동남아 각국을 주무대로 뛰는 이른바 보따리 무역상이다.

1년중 250일은 집밖에서 보내는 ‘역마살’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가 반가와 할 얘기는 아니지만, 누가 본다면 소위 ‘역마살’이 들었을 법도 하다. 13년동안 외국만 휘젓고 다녔다. 한달에 20일은 외박, 교통비만도 160여만원이다. 일본과 중국 등지를 오가는 비행기 삯이다. 생활터전도 3분배. 일본에서 10일, 중국에서 10일, 가족이 있는 한국도 차별없이 10일. 더 있고 싶어도 ‘몸이 근질거려’ 다음 장소로 옮기지 않곤 못 배긴다. 핸드폰도 각 나라마다 쓸 수 있게 한국, 일본, 중국용 세가지. 007 가방속의 돈도 3국 화폐로 공존한다.

가족들은 너그럽다. 1년중 250일 집을 비워도, 타박 한 번 없다. 한 번의 부도를 겪은 뒤 얻은 자발적인 묵계다. 혹은 있어봐야 둘째딸의 ‘아빠 언제 와?’ 타령뿐이다. 또 그의 알리바이는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서울 개포동 사무실이 아니면 동경 영업지점, 그것도 아니면 중국 청도의 생산공장. 뛰어봐야 셋 중 하나다.

그가 운영하는 동진 코스콤은 현재 연간 매출액 60~70억원의 중견기업이다. 주로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갖가지 성인용 게임기나 봉제인형, 카메라, 시계, 모자, 머그잔 등 각 분야 사은품 혹은 경품용 제품들을 직접 생산, 납품하고 있다. 소위 어뮤즈먼트(amusement) 산업으로, 오락문화가 발달된 일본에서는 물건은 없어서 못 댈 만큼 수요가 큰 틈새시장이다. 여기에다 최근엔 캐릭터 상품을 취급하는 일명 라이선스 사업까지 손을 대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하이틴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미스터 빈 인형이나 텔레토비 열쇠고리도 그가 상품권을 가진 제품들이다. 중국에는 직원 850여명의 대규모 생산공장을 두었고, 일본은 그 물건들을 내다파는 영업기지다. 한때는 종업원 500여명 규모의 태국 공장도 있었고, 필리핀에까지 사무실을 연 적도 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입신, 성장가도를 달려온 젊은 사장.

비결은 그의 남다른 사업감각과 추진력에 있다. 셈에 관한 한 누구보다 환한 일본인들의 땅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만큼 기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잠깐 ‘치고 빠지는’ 유행상품이다보니 그때그때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그는 매년 외국의 국제 캐릭터상품전시회는 한 번도 거르지않고 개근. 한국에서도 자사의 인형이나 열쇠고리같은 시제품을 들고 서울시내 중·고생들을 직접 찾아 반응조사에 나설만큼 철저히 현장중심이다. 그들의 반응만 봐도 성공여부는 금새 판가름난다. 그는 사업보다도 그러한 ‘예측과 적중’의 게임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역업 7년 공든탑, 한번의 부도로 무너져

5년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던 재기다. 맨주먹으로 무역업계에 뛰어든지 7년만에 단 한 번의 부도로 모든 것을 잃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당시 동경엔 차씨 소유의 게임점만 3호가 있었다. 하루 순수익이 1,000만엔을 넘을만큼 잘 나가던 시절, 무리한 ‘과속’을 했다. 하루빨리 국내에 돌아오고 싶은 욕심에 너무 일찍 일을 벌인 것이다. 갖고 있던 전재산을 털어 한국에서 성인용게임기 사업을 벌였다. 11가지 종류를 개발했지만, 끝까지 완성된 것은 고작 7가지. 그것도 부품이 없어 일본에서 비행기로 공수하는 등 온갖 수선을 피워가며 1년 이상이나 끌어 만든 것이었다. 게임기를 완성하자 이번엔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형편에서는 비싸다는 것이었다. 전재산을 쏟아부은 기계는 쓸모없이 먼지만 뒤집어쓰게 됐다. 절대적으로 타이밍을 오판했던 것이다. 더욱이 94년 8월엔 일본경제의 거품이 무너져내리면서 마지노선인 현지의 게임점마저 불황에 빠졌다. 자금순환이 꼬이기 시작, 결국 도미노처럼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결국 국내 게임기 사업은 제대로 가동해보기도 전에 ‘게임 오버’. 급할 때 빌어쓴 사채도 사정을 악화시켰다. 최악의 고리대였다. 5,000만원을 빌리면 담보를 잡고도 단 열흘에 2,000만원의 선이자를 요구했다. 그 돈까지 빌어쓰며 필사적으로 막아보려했지만 결국 부도 통고를 받던 날은 차라리 ‘모든게 끝났다’는 평안함까지 느낄 정도.

뒷처리를 위해 일본 현지로 날아간 사이, 가족은 벌떼같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난생 처음 보증금 40만원에 월세 8만원의 네평짜리 단칸방 신세까지 전락했다. 그렇게 1년간을 숨어 살았다. 그 바람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큰 딸의 취학시기까지 놓쳤다. 결국 이듬해 다른 구실을 만들어 입학하긴 했지만 평생을 따라다닐 상처가 됐다.

한이 맺혀 1년을 살았다. 다시 뭔가를 해보려 해도 가까운 친인척조차 인감 한 통 떼주려 하지 않았다. 파산자란 그런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오히려 의형제를 맺었던 중년의 일본인 기업가 니시와키씨의 도움덕분이었다. 방금 한국에서 부도를 내고 온 빈털터리 차씨에게 그는 큰 생색 한번 내지 않고 1,500만달러를 건네주었다. 평소 쌓아둔 친분과 인간적인 도움이었다.

그 돈을 바탕으로 일본인 바이어와 한국 재고품상을 연결해주는 디스카운트 도매상 중개일을 시작,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쌓인 부채도 갚고, 그를 괴롭히던 형사소추건도 원만하게 해결을 보았다.

한 맺힌 부도, 밤잠 설치며 책도 펴내

그러나 부도때의 상처는 오래도록 계속됐다. 사업이 제자리를 찾은 뒤에도 그가 이를 갈며 생각한 것이 그때의 일이었다. ‘너무 한이 맺혀’ 출장길에서까지 밤잠 설쳐가며 쓴 원고 900매가 ‘무역을 안고 세계를 향하여’란 책이다.

행운 아닌 행운도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교수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일본 쯔쿠바 대학까지 유학을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늦긴 했지만, 그 기회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찾아들었다. 지난 1월에 발간된 책을 인연으로 곳곳에서 강연요청이 들어왔다. 그중 순천향대에선 2시간짜리 특강을 한 뒤 학교측으로부터 겸임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거절했다. 교수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그에겐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바쁘고, 무역일 역시 아무나 하는게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 원리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부도를 겪어 다행이란 생각을 할만큼 그는 ‘그 일’로 성숙했고, 정신적 여유도 되찾았다.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다. 갑부는 아니어도 9남매의 맏아들인 그를 전주 대처에까지 보내 유학시킬만큼 살림은 넉넉했고 부모님의 배려도 컸다. 어려서부터 그는 ‘배포 큰 아이’ 였다. 전주대 시절엔 우연히 마주친 사창가 소녀의 구조요청에 친구들을 긴급동원, ‘비상탈출작전’을 지휘한 바 있고, 방앗간 외삼촌의 비상금, 아버지의 누에고치 판 돈을 끌어모아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한 경력도 있다. 첫 눈에 반한 부인은 교수님 힘까지 빌어가며 끈질기게 구애, 결혼에 이르렀으며, 일본 쯔쿠바 대학원 유학시절 한 재미교포 사업가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맡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지사장직을 제의받아 무역일에 들어섰다. 그리고 9개월만에 독립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7년간 승승장구였다. 처음엔 가리는 품목 없이 무엇이나 다 다뤘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어뮤즈먼트’ 상품. 수요도 많고 생산가도 비교적 낮아 웬만한 감각만 있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복병도 적지않게 만났다. 그 위기를 이길 수 있는건 아이디어뿐이다. 언젠가 여자 허리띠를 만들던 중, 생산과정상 오류로 길이를 잘못 잘라 못쓰게 된 짧은 허리띠가 있었다. 반품량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 거래처 사장을 만나 의논하다말고 떠오른 것이 개목걸이. 아예 몇센티미터를 더 잘라내고 ‘고급 개목걸이’로 용도를 변경했다. 그러자 오히려 판매외 주문까지 쇄도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또 한 번은 한여름 컨테이너의 내부온도 때문에 제품에 붙였던 본드가 모두 녹아 떨어져내린 일이 있다. 가차없이 클레임이 걸렸다. 그때 그가 한 일? 당장 거리의 이란노동자들이며 현지의 거지들까지 비상 동원해 풀가동, 한여름 찜통같은 지하공장에서 사장, 직원, 거지 60여명이 뒤섞인채 며칠 밤낮을 철야작업으로 지새며 납품기일을 맞췄다. 거래처 사장을 감동시켰음은 물론이다. 그의 순발력은 그런 곳에 있다.

5분더 생각하고 결정하는 신중함 생겨

그러나 그렇듯 배포 좋던 그도 부도후 달라졌다. 예전처럼 잘 벌고, 잘 쓰던 ‘손 큰’ 남자가 아니다. 점심도 혼자 먹고, 무턱대고 술값이며 식사비라면 혼자 도맡아 내던 버릇도 이젠 때와 장소를 가리고 있다. 성질이 급해 즉석에서 결정하고 말던 일도 이젠 5분 더 생각하고, 5분 더 대답을 늦춘다. 누구든 하루아침에 꺼꾸러질수 있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

변하지 않은 것은 고집뿐이다. 남들이 열이면 열 다 안된다고 하는 일도 ‘어쨌거나 내 눈으로 직접 해보고 바닥을 봐야’ 겨우 물러서는 그다. 그 고집으로 다시 게임기 사업을 밀고 있다. 두 번째 시도다. 이번엔 타이밍이 잘 맞을까? 국내 PC게임방 열풍만 지나가면 터뜨릴 13년 불굴의 야심작에 그는 다시 인생을 걸었다.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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