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선택, 이시하라의 '보수'

04/22(목) 14:11

일본의 보수 논객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66) 전운수성장관이 11일 통일지방선거에서 도쿄(東京)지사에 당선됐다.

그것도 선거전의 여론조사에서 늘 선두를 달리면서도 법정당선 기준인‘유효투표의 25%’획득 여부가 관심을 끌었던 것과는 달리 30.6%, 4년전 무당파 돌풍을 일으킨 아오시마 유키오(靑島幸男)지사가 얻은 180만표와 거의 비슷한 166만표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75년 도쿄지사에 출마, 혁신계의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 전지사에 무참히 패배한 이래 24년만에 꿈을 이루었다.

일본 수도 도쿄의 유권자들이 보수→혁신→보수→개혁 후보를 번갈아 지사로 뽑아 온 역사로 보아서는 심정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보수주의자인 그의 순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조직의 지원을 일절 받지 못한 그가 자민당과 민주당 추천 후보를 압도한 것은 ‘이시하라 선풍’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무엇이 도쿄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전학공투회의’(전공투·全共鬪)의 신좌파 운동이 일본 전국 대학을 휩쓸던 69년 가을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마주 앉았다.

미시마가 우익단체 ‘방패회’를 이끌고 도쿄(東京) 이치가야(市ケ谷)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를 점거, “천황의 군대로 총궐기하라”고 외치며 할복 자살하기 꼭 1년전이다. 또한 이시하라가 자민당 전국구 후보로 나서 300만표의 최다 득표로 화려하게 참의원에 당선된 이듬해의 일이다.

44세의 미시마는 당시 일본 현대문학사 최고의 천재 작가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37세의 이시하라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다. 히도쓰바시(一橋)대학 재학중이던 23세 시절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따낸 실력이었다. 수상작 ‘태양의 계절’은 ‘태양족’이라는 유행어를 낳았고 그의 헤어스타일을 본딴 ‘신타로 머리’는 거리마다 넘쳤다.

당시 신문학 운동의 기수로 각광받은 그의 작품 세계는 미시마 문학과 닿아 있었다. 미시마가 ‘섬뜩한 칼끝에서 피어나는 선연한 피꽃의 미학’에 취했다면 이시하라는 육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학의 순수성’에 매료됐다. 이런 가학과 자학의 차이는 미시마 스스로의 할복 자살이 보여주듯 동전의 양면이다. 마찬가지로 미시마의 열렬한 천황주의·국수주의와 이시하라의 보수주의도 뿌리가 닿아 있었다.

얘기가 전공투 운동에 미치자 미시마는 “우리는 좌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있다”면서 “그 첫번째가 민족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시하라는 “전공투 학생들은 감각이 대단히 날카롭다”면서 “이 시대의 거짓말, 미적지근한 목욕물같은 민주주의의 거짓말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공명할 만하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이시하라는 ‘반미’민족주의보다는 ‘시대의 허위’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시하라가 ‘반미’민족주의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미시마가 할복 자살한 이후부터였다. 특히 89년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소니 전회장과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써서 화제를 부르면서 ‘반미’민족주의는 그의 중심 이미지로 정착했다. 미·일 양국의 무역분쟁에 대해 이시하라는 미국이 주장하는 ‘일본 책임론’을 철저히 공박했다.

지난해 속편격인 ‘선전포고-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경제’도 마찬가지였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알뜰히 저축한 일본이 사상 최악의 불황에 허덕이는 반면 미국이 예를 찾기 힘든 호황을 누리는 것은 오로지 국제 자금순환 구조가 왜곡된 때문이다. 미국의 고금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일본의 저금리 정책으로 무역흑자로 거둔 일본의 막대한 달러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침체, 미국의 활황을 가져왔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이 왜곡된 자금순환 구조의 시정에 나서도록 요구해야 하며 최악의 경우 막대한 달러 자산 매각이라는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전편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일본 국민의 뇌리에 사라져 가던 이시하라의 존재를 다시 부각했다. 그것이 바로 도쿄 지사선거 재도전의 계기였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89년 당시 ‘노라고-’의 인기를 업고 자민당 총재선거에 나섰다가 당내 계보정치의 벽에 부닥쳤지만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선거는 다르기 마련이다.

더욱이 자민당의 후보 분열로 자민당 지지자들이 방황하고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민당이 수도 탈환의 기대를 걸고 공식 추천한 후보는 아카시 야스시(明石康) 전유엔사무차장. 가키자와 고지(枾澤弘治) 전외무장관이 당의 결정에 반발, 독자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두 사람 모두 당선이 어려운 상황에서 뒤늦게 출마를 선언했다. 실제로 자민당과 자유당 지지자의 약 50%, 무당파층의 약 30%가 그에게 표를 던졌다.

“도쿄에서부터 일본을 바꾸어 나가자”는 주장이 먹힌 결과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한 주장을 빼놓지 않았지만 요코다(橫田) 미군 기지의 반환까지 공약하는 이시하라의 과감한 어법에 미칠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일본정부에게 미국에 대해 분명히 주장할 것은 주장하라고 주문해 왔다. 마찬가지로 예산 규모로 뉴욕의 2배에 달하는 거대도시 수장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강한 자기 주장을 펼 것을 약속했다. 심각한 불황하에서 중앙 정부의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도쿄 유권자들은 직설과 독설로 유명한 이시하라만이 강하게 불만을 대변해 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이같은 선택에 대해서는 ‘강한 지도자를 골랐다’는 분석이 대세이나 ‘일본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요코다기지 반환이라는 ‘반미’공약도 그렇고 개인적 성향으로도 후보중 가장 보수성이 짙기때문이다. 그러나 이시하라는 일본 보수파의 본류가 아니다. 자민당 시절부터 그는 늘 ‘외로운 늑대’였다. 또 그동안의 예에 비추어 일단 도쿄 지사에 당선된만큼 중앙정계와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더욱이 보수 본류인 자민당 주류는 흔히 우려하는 국수주의로부터는 날로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다만 그가 앞으로 중앙정부와의 줄다리기 과정에서 특유의 독설을 내쏟아 여론을 자극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도쿄지사의 발언권이 가진 한계를 고려하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공약의 핵심이던 요코다기지 반환 문제와 관련, “도쿄 지사 권한밖의 일이고 고려하지도 않는다”고 일본 정부가 반발하고 나서자 벌써 ‘민간과의 공동 이용’으로 한발 물러난 것도 그런 분위기를 뒷받침한다.

도쿄= 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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