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답답하다. 나쁜 놈들은 교묘하게도 법망을 피해가고 나라를 망친 이들은 반성하거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만화의 주인공처럼 높은 산에 올라 ‘이 나쁜 놈들아’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다.

그래서 그런가. 만화같은 드라마,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가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선과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착한 이들이 괴력을 발휘해 제 몫을 찾으며, 악인은 그에 걸맞는 징벌을 받는다. 권선징악은 비현실적이어서 교훈이다. SBS TV의 <미스터 Q>와 <승부사>, MBC TV의 <내일을 향해 쏴라>등은 현실을 그리지만 내용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한결같이 정의가 승리한다.

IMF, 구조조정, 실업자, 그리고 민생은 뒷전으로 제 밥그릇 싸움에만 눈이 먼 정치인, 200억대 재산가 공무원 주사(主事),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기업주 등. 매일의 신문지면은 황당한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서민들의 현실은 이들과 너무 멀어보인다. 서민들은 너무나 달라보이는 다른 세계 사람들의 황당한 행태들을 보며 절망하게 된다. 현실에선 좀체 선과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아직도 우리의 드라마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고 있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드라마는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제서야 흡족하다.

올 여름 김민종과 김희선을 다시 한번 톱스타로 끌어올린 SBS TV <미스터 Q>는 원작 자체가 만화. 만화가 허영만의 동명 작품을 드라마화 했다.

평소 무능하고 뻣뻣하다는 이유로 간부의 눈밖에 났던 권해효 정원중 조혜련 등은 IMF 한파로 인해 한직으로 밀려난다. 여기에 입사하면서 바로 눈밖에 난 김민종과 김희선도 가세하고 극적으로 회생한다. 더욱이 자신들을 한직으로 몰아냈던 간교한 간부를 아주 멀리 날려보내버리는 괴력까지 발휘한다.

이런 과정에서 김민종과 김희선을 비롯한 밀려난 사원들은 예전의 무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만능으로 변한다. 일이면 일, 놀이면 놀이 뭐듣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유능한 사원으로 변신하며 화려하게 회사 중앙으로 복귀한다. 말 그대로 만화같은 초능력과 우연이 반복되지만 김민종이 못된 상사 명계남을 한 방에 날리는 순간에 시청자들은 박수까지 쳤다.

MBC TV <내일을 향해 쏴라>는 그 어렵다는 무명가수의 성공기를 그리고 있다. 유오성 박선영 서유정 등 신인들을 주인공에 캐스팅한 이 드라마는 방영 1개월여만에 김종학 PD 스타군단의 SBS TV <백야 3.98>을 누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방영 초기만해도 <내일을 향해 쏴라>의 <백야 3.98> 대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전망과 함께 심지어 ‘땜빵용 드라마’란 무시까지 받아야 했다. 톱스타들이 곱지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백야 3.98>과 같은 방송시간대의 드라마 출연을 기피하는 웃지못할 촌극까지 벌어졌으니 방송 초기의 분위기를 짐작할만 하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난 후 양상은 사뭇 달랐다. 물론 <백야 3.98>이 당초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내용이어서인지 시청자들이 외면했기때문에 얻은 어부지리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돈과 빽이 든든한 기획사를 나와 천부적인 재능과 맨몸으로 부딪히는 땀에 의지해 스타로 발돋움한다는 이야기자체가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붙잡기 시작했다.

밤무대 가수가 주위의 도움없이 재능과 땀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게 바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면서도 시청자들은 그걸 현실처럼 받아들이며 좋아한다.

KBS 2TV <야망의 전설>은 최수종의 도망 장면을 만화처럼 그려 인기 상종가를 기록했다. 최수종은 무능한 경찰과 음모에 휩싸인 정보기관을 비웃듯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쳤다. 극중에서 사미도를 빠져나와 어느 목장의 허허벌판에서 수백명의 군인들에 포위되어 잡히기까지는 무려 두달여동안 안방을 넘나들었다. 억지 늘리기의 지루한 탈출이 어어지면서 ‘늘리기’란 비난을 받을만도 했지만 오히려 시청률은 껑충 뛰었다. 시청자들은 마치 최수종과 함께 이 산 저 산을 도망다니는 심정으로 통쾌함과 함께 스릴을 만끽했다.

SBS TV <승부사>의 악당치기도 같은 맥락에서 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검사출신 변호사를 축으로 전직 형사와 프로 사기꾼들이 모여 사회의 부정부패 세력을 응징한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구조이지만 시청자들은 이곳에 채널을 고정시킨다.

사기꾼 또한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제거대상. 하지만 이 사기를 이용해 사회의 더 큰 도둑을 제거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을 통쾌하게 만든다. 고관대작들이 일개 사기꾼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은 상상하기만해도 즐거운데 드라마를 통해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더 즐겁다.

물론 사기꾼들을 무작정 미화시키지 않는 적절한 장치들도 준비해 놓고 있다. 전직 형사출신의 송승헌이 중요한 순간에 사기꾼들의 망발을 미연에 막는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고 사기꾼들도 개과천선해 바람직한 삶을 살게 만든다. 지고지순의 진리 정의가 승리하는 드라마의 마지막이다.

<승부사>의 이강훈 PD는 “이 드라마는 IMF사태가 터지기전인 지난 해 여름께부터 기획했는데 공교롭게도 분위기가 맞아떨어졌다”고 시류에 영합한 기획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의 출발점도 불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바꿔보자는 것일게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제로 보여지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대리만족을 드라마에서 찾는가 보다”고 말한다.

국제기구가 조사 발표하는 각국의 부정부패순위에서 한국은 갈수록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산다. 시청자들이 선과 정의가 극적으로 승리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당연시하고 오히려 악이 살아남는 드라마를 보면서 ‘음_. 100번에 한번은 그럴수도 있겠지’라며 의아해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려 본다.

박창진·일간스포츠 연예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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