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보는 조상들의 지혜4] 종로구 창덕궁

04/28(수) 08:19

조선조 궁궐하면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그리고 경운궁(덕수궁)을 들 수 있다.

정종(定宗)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太宗: 李芳元)은 다시 개성에서 서울로의 환도를 결심한다.

태종은 경복궁창건 때부터 좋지않은 일이 잇따라, 정궁을 다시 지으려했다. 그러나 태조(太祖: 李成桂)가 창건한 경복궁이 엄연히 있는데, 왜 하필이면 새 궁궐이냐며 조준(趙俊)등 중신들의 반대여론에 밀려 결국 이궁(離宮)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昌德宮)이다.

창덕궁은 정궁은 아니면서 가장 많은 임금이 정사를 살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곳(大造殿:興福軒)도 여기요 또한, 수 많은 궁중 비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되는 역사의 회오리를 간직한 창덕궁은 임진왜란 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조정은 경복궁의 터가 불길하다고 해서 가장 먼저 창덕궁 중건에 착수, 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했다. 이후 창덕궁은 역시 임진왜란때 불탄 경복궁이 중건(1867)될 때까지 조선의 정궁으로서 그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창덕궁은 우리나라 5대궁 가운데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을 뿐더러 그 규모와 면적도 무려 43만4,877㎡나 되는데다가 원림(苑林: 조경)이 조선왕조의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아울러 수려한 조경도 세계자연풍치림으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어찌되었던 창덕궁은 우리나라 궁 가운데서도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전각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으며 1912년부터는 후원(後苑: ‘비원’은 일제가 개칭한 이름임)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광복뒤에도 창덕궁과 후원 등 제한된 구역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후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 당(堂), 합(閤), 각(閣), 제(祭), 헌(軒), 루(樓), 정(亭)의 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다.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된 뒤 ‘선왕의 상중(喪中)’ 이라는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이 궁에 들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마지못해 창덕궁으로 이어(離御)한 뒤 20일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이의신이라는 술사의 말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노산군(魯山君: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됐기 때문에 창덕궁에 들기를 무척 꺼려했던 것으로 ‘광해군 일기’는 쓰고 있다.

중건 5년만에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창덕궁에 든 광해군도 8년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결국 노산군,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인조반정이 있던 날 창덕궁엔 두번째 큰 불이 나 인정전(仁政殿) 등 몇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에 따라 인조 25년(1647) 광해군이 공들여 지었던 전각을 헐고 창덕궁 재건공사를 시작, 그해 11월 복구공사를 완료했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 중창은 없었다.

그러나 순조(純祖)3년(1803) 12월에 또 다시 큰 화재가 일어나 인조반정 때 화재를 면했던 인정전 등 주요전각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듬해 완공된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른다. 세번에 걸친 대화재와 세임금이 왕궁을 떠나야 했던 이궁 창덕궁!

‘이궁(離宮)’ 이라는 창덕궁의 별칭 탓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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