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8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장.

“현재 10만원권 자기앞수표는 너무 문제가 많아요. 이젠 10만원 화폐를 발행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총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며 한 국회의원이 고액권 발행에 대한 전철환 한은총재의 견해를 물었다.

“고액권 발행문제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신중히 검토해서 정부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답변하지 말고 좀 더 긍정적으로 추진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고액권 발행을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이날 국정감사에서 고액권 발행주장을 편 의원은 한두명이 아니었다. 수일전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의원들은 10만원권 발행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25년전 발행, 경제규모 20배 이상 증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고액권 발행논의의 진원지가 정치권이란 사실은 재미있는 대목이다. 발권당국의 한 관계자는 “고액권 발행문제는 매년 국정감사때마다 거론되는 단골메뉴다. 정치권이 고액권 발행을 왜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하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액권이 발행되면 가장 편리한 계층, 다시말해 수표가 가장 불편한 측이 바로 정치권이란 얘기다.

하지만 정치권의‘희망사항’이란 사실 때문에 고액권 발행주장을‘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을 것같다. 실제로 10만원권 자기앞수표 페지론, 또는 10만원권 고액권발행론은 금융계와 학계일각에서 오래전부터 대두되어 왔으며 갈수록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다한 유통 비용, 사용상 불편함도 많아

10만원 화폐발행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필요성을 몇가지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경제규모와 발전정도에 비해 고액권 단위가 너무 낮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1만원권은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선이던 73년에 처음 등장했다. 경제규모가 20배 이상 커졌고 국민경제의 거래단위도 그만큼 고액화했는데 돈만 25년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시대착오적’이란 것이다.

우리나라의 화폐단위가 외국에 비해 너무 작은 것도 사실이다. 각국의 최고액권을 원화로 환산해보면 미국(100달러)은 약 13만원, 일본(1만엔)과 영국(50파운드)은 11만원, 독일(1,000마르크)은 80만원, 프랑스(500프랑)는 12만원, 스위스(1,000스위스프랑)는 무려 100만원이 넘는다. 우리나라에 비해 작게는 10배, 많게는 100배까지 고액권 단위가 큰 것이다. 화폐가 고액화하는 것은 물가상승에 따른 화폐가치의 하락, 경제성장, 소득증대의 자연스런 결과라는게 고액권 발행론자들의 주장이다.

음성거래, 계층간 위화감 조자 가능성도

둘째, 현찰처럼 통용되고 있는 10만권 자기앞수표의 발행 및 유통비용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10만원권 수표 한장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27원. 한해동안 12억1,400만장이 발행됐기 때문에 발행비용만도 328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금융기관이 수표를 취급하는데 드는 인건비, 수송보관비, 교환비용 등 부대비용이 장당 850원이어서 연간 교환장수가 9억1,700만장에 달한 점을 감안하면 유통비용만도 7,800억원에 달한다. 따라서 10만원권 자기앞수표를 발행하고 교환하는데 드는 총비용은 무려 8,000억원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 10만원 자기앞수표를 없애고 같은 금액의 새 지폐를 발행한다면 이 엄청난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금융기관의 인력감축효과도 그만큼 클 것으로 보인다.

세째, 10만원권 자기앞수표 사용에 따르는 번거로움도 고액권 발행요구를 부추기고 있다. 쓸 때마다 배서를 해야 하고 현찰과 바꾸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한다. 배서때 기재되는 주민등록번호는 개인정보의 불필요한 유출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소지도 있다는 것이다. 분실 도난에도 무방비다.

특히 IMF이후 신용위험이 커지면서 아예 수표결제를 거부하는 곳도 많다. 지방은행 발행 수표는 받더라도 추심수수료를 내야하며 그나마 은행영업시간 이후에는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네째, 현 경제상황에서 경기를 부양하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고액권은 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폐단위가 커지면, 번거로운 수표 대신 고액지폐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씀씀이가 커질 것이고 이는 극단적 소비위축이 나은 현 경기침체를 조기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10만원권 신종화폐를 발행할 경우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음성거래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금융실명제가 무기력해진데다 부패방지법같은 검은돈 퇴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액권이 등장해 최소한의 자금추적에서조차 자유로워진다면 뇌물이나 음성정치자금 수수를 막을 방법이 없고 검은 거래의 단위도 함께 고액화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한 예로 007 가방에 1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약 1억5,000만원이 들어가지만 10만원권 화폐가 발행되면 15억원을 가방하나로 전달할 수 있다.

고액권 발행이 가져올 계층간 위화감도 무시못할 요인이다. 10만원짜리 고액지폐가 등장할 경우 소비가 늘어나는 쪽은 고소득층에 국한될 수 밖에 없다. IMF이후 계층간 소득격차가 벌어지고 절대빈곤층이 늘어난 상황에서 10만원권 발행의 혜택이 극소수 상위계층으로만 돌아간다면 나머지 계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정서적 거부감은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발권당국인 한국은행의 태도다. 한은 고위당국자는 “인플레심리를 촉발시킬까봐 10만원권 지폐를 못찍겠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 변명에 불과하며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은 어느정도 공감한다”며 “그러나 10만원권을 발행하려면 반드시 음성거래차단을 위한 법제도 마련과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반적 추세로 볼때 언젠가는 고액권은 발행될 수 밖에 없다는게 중론. 만약 현재 논의되고 있는 부패방지법이 제정되고 국민설득이 이뤄진다면 고액권 발행시기는 생각보다 앞당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전제조건들은 고액권 발행이 단지 새로운 권종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 개혁과 맞물려 있음을 뜻한다. /이성철·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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