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얼굴만 예쁜 여자들의 모임이 아니예요"

05/04(화) 16:33

70년대 신데렐라가 세 아이의 엄마로 돌아왔다. 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38). 가수와 작곡가, 패션 디자이너, MC, 광고모델로 연속타를 날린 뒤 시야를 벗어났던 그녀가 외국생활 10여년만에 국내 방송가로 복귀, 새로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출연무대는 케이블 TV LG 홈쇼핑(CH45)의 보석 전문 프로그램 ‘주얼리 퍼스트 클래스’. 막내 주훈(1)이의 양육을 앞세워 방송출연을 고사해오던 그녀가 이번 만큼은 스스로 솔깃해 자리를 맡고 나섰다. 지난 3월 23일에 첫 출연, 10년여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오랜만에 출연하는 방송이지만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보석은 제가 했던 패션 디자인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전부터 관심이 많았거든요. 금전적인 가치를 떠나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잖아요. 여성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이기도 하구요. 제 나이는 아직 이르지만, 보석을 가까이 할만한 좀 더 연배 높은 여성들에게 제가 직접 좋은 정보를 전해드릴 수 있다는 보람도 있습니다.”

특별한 대본도 없다. 장장 2시간짜리 생방송을 즉석의 애드립만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대본없는 생방송이란 불안하기 마련이지만, 차라리 ‘나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어 그녀에겐 즐겁다. 진작에 보석에 관한 공부까지 해두었던 터라 준비된 상식도 두둑하다. 얼마전 지독한 감기로 방송중에 한바탕 기침을 터뜨린 일외엔 완벽한 순항. 더 이상 예전의 한국판 마론인형의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회장임기내 봉사단체로의 확실한 자리매김이 목표

70년대 올드팬들이 기억하는 김성희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방송외에도 요즘 녹초가 되도록 뛰어 다니는 녹원회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3월 그녀는 역대 미스코리아들의 친목단체인 녹원회의 13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녀는 확실히 에너지가 많은 여자다. 회장이 된 후 녹원회에 쏟아붓는 추진력도 거의 여장부급이다. 회장직에 오른 뒤 첫 일성이 ‘임기내 봉사단체로서의 확실한 자리매김’ 이었다. 녹원회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 사실상 전조가 있었다. 작년 수해때부터 녹원회의 이름이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기 시작, 봉사활동에 대한 회원들의 열의가 돋보였다. 그참에 그녀가 회장직까지 맡게되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 붙였다. 4월 들어 벌인 일만도 LG홈쇼핑의 15시간 생방송 미스코리아 자선 패션쇼, 일산 호수공원의 소아 암환자 돕기 사랑의 단축마라톤대회 등 행사가 잇따랐다. 현재도 삼성 플라자 분당점에서 ‘성남시 결식 아동돕기 패션 대축제’를 여는 등 나름의 방법으로 이웃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안으로는 녹원회 정관도 다시 만들고, 임원진도 대폭 보강했다. 미스코리아로 선발되면 자동가입이나 다름없던 회원들도 기존회원들로부터 가입승인을 묻는 일련의 모양까지 갖추게 했고, 어떤 사안이든 정당한 의결절차를 밟아 올라가도록 격을 갖췄다. 이미 패션 디자이너 시절, ‘필로스’ 라는 사업가모임에서 닦은 지휘력이기도 하다. ‘얼굴만 예쁜’ 여성들의 한가한 모임으로 얕보이기 싫은 게 틀림없다. 남들이 모르는 김성희의 힘이자 자존심이다. 하고 싶은 동기부터가 남들과는 차이가 있다.

“저는 남들이 꿈이라고 말하는 것,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 실현하는 일이 가장 좋아요. 녹원회 사업도 처음엔 제가 계획들을 내놓자 다들 ‘꿈 같은 얘기다. 안될거다’ 라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되든 안되든 시도해보는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잖아요. 저는 무슨 일이든 철저한 계획을 갖고 거기에 맞춰 일을 추진하는 타입이죠. 또 일단 선택한 일은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방법을 찾아내구요. 우리 녹원회는 자체의 돈은 없고 사람만 있는 모임이예요. 비록 직접 가진 돈은 없지만 우리가 가진 장점, 능력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기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봉사에 필요한 돈은 직접 자선바자회나 패션쇼, 디너쇼 등을 열어서 마련하고 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얼마전 서울대 소아과 병동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1,000만원을 내놓았을 땐 참 뿌듯했지요.”

통장도 두 개. 녹원회 운영비 전용 통장외에 봉사기금 통장을 별도로 관리해 본래의 목적외엔 용도를 봉쇄해버렸다. 얼핏 들리는 금액규모가 수천만원에 이르지만, 끝자리수 하나까지 기억할만큼 통장단속에도 철저하다. 방송시작 5분전까지도 수시로 날라드는 녹원회 관련 전화. 어디에 있든 열성 ‘봉사’ 해야하는 녹원회 회장직도 이름만 듣기좋은 3D중 하나가 아닐까.

미인대회 출전 후배들 보면 ‘안스러운 생각’ 들때도

최근엔 30일 열린 미스 서울대회 심사위원까지 맡아 더욱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줄곧 외국에서 살아온 탓에 미인대회 심사위원으로 초청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2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 무대에 올라 있는 어린 후배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참 대견하고 이쁘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어떻게 앞으로 헤쳐나갈까 한편 안스러운 생각도 들구요. 너무 일찍 그런 화려한 조명을 받다보면 남모르는 고통도 있거든요. 저요? 저야 외모상으로야 전성기를 지난지 한참됐죠. 또 그런것만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조금씩 지나오면서 보니 인생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나이에 맞는, 그 나이가 원하는 뭔가가 있다는걸 알았어요. 나이먹는게 속상하다든가 그런 것도 극복한지 한참 됐고, 그냥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보여요.”

가끔은 ‘그때(77년) 대회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를 할 때도 있다. 그랬다면 그 어린 나이에 세상에 휘둘려가며 힘들게 살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대학에 실패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자기 인생이 180도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믿고 있다.

미스코리아 출전은 순전히 우연한 선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좌절이란 걸 몰랐다. 2남1녀중 고명딸로 자란 그녀는 중, 고등학교 때까지도 어머니가 매일같이 하교길 버스정류장에 나와 기다리던 말 그대로 온실속 화초였다. 그러나 대학입학에 실패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힘으로 안되는 것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에 붙은 포스터를 본 뒤 대회출전을 결심, 이틀정도 생각한뒤 불쑥 저질러버렸다.

온갖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뒤, 한동안은 좋았다. 방송에 나가는 것도 재미있었고, 한국 최고의 미녀 대접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한계 수위를 벗어날 때부터였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싫어도 방송에 끌려 다니는’ 상황이 찾아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터라 ‘아는 게 별로 없는’ 그녀에게 전문가들과의 대담 프로그램이 곧잘 맡겨졌다. 고역중에서도 가장 큰 고역이었다. 자신도 뭔 말인지 모르는 이야기를 짐짓 아는 체 떠들어야 했고, 고명하신 어르신들의 대답 또한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속수무책으로 웃음으로 떼넘기던 기억들 뿐이다. 끔찍스러운 건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가 스스로 너무 한심스러웠다는 것이다.

어린나이에 남들에게 휘둘린 인생, 다 접고 유학길로

물론, 얻은 것도 많았다. 남들이 평생에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불과 4-5년사이 원없이 해봤다. 82년에는 가수로 데뷔, ‘매력’ 이라는 곡으로 대히트, 그해 신인가수상까지 수상했고, ‘세계는 친구’ ‘꿈’ 등 직접 작사, 작곡한 곡도 여럿이다. 86년 가수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발표한 음반만 6장. 또 TV광고모델로도 상종가, 당시 태평양화학, 부광약품, 동성제약 등 이름난 기업들마다 앞다투어 그녀를 모셔가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을 뚝 잘라버렸다. 정신적으로 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것들이 너무 급하게 몰려들자 서서히 그녀 내부에 금이 갔다. 다행스러운 건 용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87년엔 모든 방송연예활동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유학, 패션 디자이너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88년엔 ‘그리니스 모드’란 이름으로 청담동에 의상실을 열었다. 대상은 주로 젊은 주부층으로, 꽤 성공적이었다. 앞으로도 국내에 있든 외국에 있든 언젠가는 디자이너로 재개할 생각을 갖고 있을만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그 가운데 사업가들의 사교모임 ‘필로스’ 에서 남편 이승원씨를 만났고, 결혼과 함께 이후 LA와 캐나다 밴쿠버 등지에서 살았다.

그 사이 공부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공부했다. 갤러리를 갖고 싶은 욕심에 미술학까지 파고 든 자칭 학구파. 그래도 본분은 언제나 여느 주부처럼 청소하고 빨래하며, 주호(9)와 주윤(6) 등 아이들 뒤치닥꺼리에 몸살도 하는 평범한 여자였다.

교민사회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자신을 알아보는 이도 하나 없어 참으로 자유로왔다. 더운 LA에선 반바지에 생머리로 아이를 들쳐안고 거리를 쏘다녀도 누구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다. 국내에서 처럼 걸핏하면 터지는 스캔들이나 가십에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없었다. 외국생활은 그래서 그녀에게 편하다. 길어야 3년이라고 계획은 세웠지만 지금이라도 언제든 원하면 바로 돌아갈 수 있게 밴쿠버 현지엔 집이며 차도 그대로 두고 온 상태.

작년 4월에는 시아버지의 별세로 잠시 귀국했다가 막내의 출산문제로 더 눌러앉았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2-3년을 더 있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돌아가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그녀에겐 든든한 배수진이다.

9월쯤 책으로 펴낼 ‘자신의 이야기’ 에 매달려

요즘 그녀는 밤잠을 설친다.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9월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로 결정한 뒤, 한밤중 아이들만 재우고나면 제까닥 원고쓰기에 바쁘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분명 그녀도 나이를 먹었고, ‘평범하고 싶었던 톱스타’로서 지난 20여년간 어렵게 체득한 지혜와 숨은 생채기들이 적지않다. 처녀 때보다 체중도 3kg이나 불었다. 예쁜 보조개가 있는 얼굴에는 카페트를 잘못 밟아 미끄러지는 바람에 작은 흉터가 생겼고, 그밖에도 허둥지둥대다가 손가락이며 다리뼈가 부러지는 등 알고보면 집안에선 3형제 버금가는 사고뭉치다. 그런 그녀에게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미스코리아 맞아?” 아무리 잊어 버렸다고 우겨도, 미스코리아란 이름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수 밖에 없으리란 사실을 그녀는 요즘에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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