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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마음 넉넉하고 푸짐한 굿 한번 벌여봤으면..."

생각만 하면 기분이 언짢다. 어떻게 그런 얼치기 무당이 다른 전체 무속인들까지 욕 보이는가, 나라 만신(만가지 신을 모시는 무당) 김금화(68)씨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화가 난다.

“그건 미치광이지, 미치광이라도 필경 또다른 미치광이한테서 사주를 받고 했을거예요. 진짜 무속인이라면 하다못해 미친 개가 나를 물려고 달려 들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 개를 피하거나 쫓아내긴 해도 직접 따라가서 죽이거나 하진 않거든요. 자기가 힘들다고 직접 가서 쇠못을 박고 그런건 차라리 정신병자죠. 그것도 역대 나랏님들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함부로 해요. 분명히 우리나라가 망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부추겼든지, 이런 일에 대충 넘어가도 안돼요. 보통으로도 안되고 아주 철저하고 세밀하게 조사를해서 다른 무속인들이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됩니다.”

지난 4월 말께부터 충무공 이순신장군 묘소를 비롯해 조선조 왕릉, 퇴계 이황선생 묘소 등 곳곳에 꽂힌 쇠말뚝과 식칼이 발견된 사건을 두고 말함이다. 한 무속인은 자신의 꿈자리가 사나워 두통을 없애려고 그랬다던가.

쇠말뚝 사건으로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 근신이 최선

철학관에선 철학관대로 이번 일로 손님이 끊어졌다고 난리이고, 무속인들은 무속인들대로 세간의 따가운 눈총에 불편한 4월을 보냈다. 국내에선 제법 크게 이름이 난 김금화씨는 역시 ‘오나가나 가장 힘없는 게 무속인’이라는 자조섞인 결론까지 내며 힘이 빠져 있다. 다른 ‘힘있는’ 종교라면 무슨 대외 발표나 자체조사라도 하면서 옥석을 가리련만, 수천년을 숨어 살다시피 지켜온 무속신앙이다보니 이럴 때도 단체로 몰매맞는 일이 보통이고, 몇몇 대표단체가 있긴 해도 여전히 남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기엔 외부의 인식이 아직 곱지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운대로 근신하는 게 차라리 최선. 대신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사회를 위한 일 많이 하고, 사람들 스스로 흑백을 가려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할 일이 많다는 건 이럴 때 참 유용하다. 마음 언짢은 일에 매이지 않고 그저 내 할 일만 하는 것으로도 그녀는 시간이 짧다. 아이러니하게도 밖으로는 미신이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막상 급한 일만 생기면 무당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때문에 평소에도 만나야 할 손님이 많은 그녀가 지난 4월엔 거의 두 배 이상 뛰어다니느라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해마다 이 무렵에 치르는 서해안 풍어제 때문이다.

그녀는 황해도 만신으로 알려진 큰 무당이자 85년 지정된 제82호 중요무형문화재(풍어제)다. 또 자신이 이끌고 있는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존회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 82_나호로 지정돼있다.

풍어제는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어민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일종의 제의식이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특기인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원래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해마다 정월에 치러졌던 풍어제의 하나다. 배연신굿은 바다에 띄운 배안에서 선주와 선원들이 모여 만선을 기원하는 것이고, 대동굿은 주민 전체가 참여해 5일동안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춤추고 노래하는 마을축제다. 실제로 지난 4월 25일에도 그녀는 인천 월미도의 대동굿을 비롯해 화수포구 앞에선 배를 띄우고 그 선상에서 한판 멋진 배연신굿을 풀어내 큰 갈채를 받았다. 꼬박 1주일을 들여 준비하고 치러내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이 땅에서 서해안 배연신굿, 대동굿을 재현할 줄 아는 최고의 고수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국가대표’ 무당

그쪽 얘기를 하자면 빛나는 이력 몇가지가 더 추가된다. 국가적으로 웬만큼 이름난 굿이라면 그녀가 거의 끼어있다. 83년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행사때엔 미국 녹스빌 국제박람회장에서 한바탕 멋진 굿판으로 외국인들을 ‘녹였고’, 90년엔 백두산에 올라가 통일기원굿을 올린 ‘국가대표급’ 무당이었다. 또 98년 5월엔 독일 베를린 장벽에서 굿을 벌이며 ‘통일의 기’를 받아와 다시 우리 임진각에다 그 기를 풀어놓은 사람이다. 또 올해 2월엔 정신대 할머니들과도 함께했다. 이들이 있는 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혼굿을 올린 것. 그외에도 입춘이면 입춘, 공연이면 공연때마다 초청돼 나름의 방식으로 축복을 선사했다.

“아프고 어려운 이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안도감과 희망을 주는 것이 무속인이지요. 통일문제도 결국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한 부모, 동기, 형제가 아닙니까.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함께 아껴쓰고 서로 도우면서, 어서 남북한 사이의 빗장을 뽑아냈으면 합니다. 통일기원굿은 통일이 올 때까지 매년 휴전선 철조망 앞에서 올릴 생각이고, 그밖에도 어렵고 힘든 모든 사람들을 껴안고 살아가면서 날마다 기도하고자 합니다.”

나이 예순을 한참이나 넘어선 요즘, 지난날을 돌아보면 개인적으로도 마음이 가는 기억들이 꽤 많다. 무당이 된지 50여년. 그 사이 점 용하다거나 굿 잘한다는 칭찬은 물론이고, 남들은 ‘무당으로 태어나 평생에 한두번 해볼까 말까’하다는 만수대탁굿을 두번이나 해봤다. 만수대탁굿은 워낙 품도 많이 들고, 비용도 만만찮은 대가집 굿이라 그만큼 기회를 만날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처음 만수대탁굿을 벌인 곳은 70년대 서울시내 신문로 공터에서였다. 그런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경찰 백차가 달려나왔다. 주민 누군가가 ‘거동수상자’로 신고한 것이었다. 그때 무당 예닐곱명 모두 알록달록한 단체복을 맞춰 입고 있었는데 경찰은 그 옷이 수상쩍다며 사상까지 의심하고 나왔다. 그렇게 경찰서로 들어가 죄없이 붙들려있던 시간이 꼬박 하루.

70년대는 사실상 무속인들에게 그리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소위 새마을운동으로 온 사회가 들썩이던 때, 가장 먼저 표적이 됐던게 무당들이었다. 미신타파운동으로 동네에 있던 마을 굿당들은 순식간에 헐려나갔고, 일반 가정에서도 일체 굿이 금지됐다. 그래서 산속으로 쫓겨가 숨죽이며 굿당을 지키거나 심지어 양로원 명패로 위장해 단속의 손길을 피하는 무당들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당끼’, 춤·사설에 능해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기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무당질’을 내팽개치고 싶은 적도 많았다. 그녀는 나이 열일곱에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되었다. 일대에선 ‘천일이 만신’으로 유명했던 무당, 외할머니로부터 피를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손녀 김금화가 무당이 되는 것을 끔찍히 싫어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 양이었는지 어려서부터 그녀를 표시나게 미워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무당끼’에 두손을 들고, 열일곱살 들던 해, 그녀에게 신내림굿을 주면서 신딸로 맞았다.

그녀가 무당되기가 쉬웠던 것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춤, 사설에 능했던 덕도 있다. 금새 사람들의 눈에 들었다. 장군신이 내리는 그녀의 점괘도 용하다고들 했다. 처음엔 겁없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거침없이 말해버렸다. ‘그 사람, 내일 모레 죽을거야.’ ‘당신 두 사람, 같이 살면 둘 중 하나는 죽어. 헤어져’_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러고 표현법도 바꿨다. 이를테면 ‘내일 모레 죽는다’는 ‘내일 모레를 잘 넘기면 잘 산다’라는 식의 역설 화법. _ 혹은 초보 무당 시절, 어떤 남자의 죽음으로 진오귀굿을 하다말고 그 자리에 몰래 찾아온 내연의 처까지 본의아니게 발각을 내는 바람에 굿판이 끝난후 선배만신들로부터 된통 혼이 난 적도있다.

자라면서 불편한 것이 또 있다. 아무리 외로워도 무당을 인간으로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 특히 무당의 가정생활은 도무지 좋게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생을 견뎌야 한다니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무당도 보통사람입니다. 잠깐잠깐씩 신의 부름을 받고 신의 일을 대신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활을 하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오히려 보통사람보다 더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기도 합니다. 무당이 결혼을 하는 것도 그런 보통 사람의 자격으로 하는거죠.”

순탄치 못한 가정생활, 초인적 의지 없으면 힘들어

결과적으로 무당의 결혼은 그리 성공적인 예가 많지 않다. 그녀 역시 두번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였다. 문제는 자기자신에게 있거나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있다. 무당 스스로 신의 일과 사람의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하거나 어느 한쪽을 너무 차별나게 위에 뒀을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혹은 무당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깥 사람들의 시선도 무당들의 삶을 더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결국 파경을 맞게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어느쪽의 잘못이건, 무당들의 결혼 생활이란 결국 남들보다 두배의 정성과 노력이 있지 안으면 잘 해나가기가 힘들다. 이런점에서도 무당들은 ‘초인’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그 꼬장꼬장하고 힘이 넘치던 큰무당 김금화도 차마 세월을 이기진 못하는 모양이다. 전엔 몇날을 뛰어도 끄떡없던 몸이 요즘은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굿판 뒤 며칠동안 몸이 부대낀다고 한다. 그래도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 자신을 돌봐주는 신령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30분쯤 뒤엔 가까운 경희대를 찾아 체조를 하는 아침일과를 거의 거르는 법이 없다.

손님을 만나는 일외에 예닐곱명의 제자도 열심히 가르치고, 부르는 곳마다 쫓아가기도 바쁘다. 당장 이번주만해도 인천 제자굿에 갔다가 부산에 다녀온 뒤, 올라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 대동굿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마치면 또 강원도 행. 훌쩍 키만 크고 깡마른 체격에 나이까지 적잖은 그녀가 어떻게 그런 강행군을 용케 견디는지 정말 ‘용하다’. 그 와중에도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가 험해지는 세상, 옛날처럼 돌아가서 마음 넉넉하고 푸짐한 굿 잔치 한 번 벌여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김금화씨. 사람마다 세상을 풀어가는 해법도 따로 있는 모양이다.

정영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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