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주고도 뺨만 맞는 장사가 제약업입니다. 억울해도 하소연할 길조차 없으니 답답할 뿐이네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폭로로 ‘뻥튀기 약값’ 문제가 새삼 불거져 나오면서 사면초가에 몰린 제약업계 관계자의 푸념이다. 약품 1개를 납품하면서 7∼8개씩 덤으로 얹어주고(할증), 보험약가나 제조원가 보다도 싸게 약을 덤핑공급(할인)해온 ‘뒷거래’ 내역이 낱낱이 공개되자 이름이 오른 제약사들은 연일 초상집 분위기다. 업계 안팎에서 나름대로 권위와 명성을 쌓아왔다고 자부하는 메이저 업체들도 예외없이 의약품 뒷거래에 연루돼 위신과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약회사들은 벙어리 냉가슴이다. 부풀려진 약값은 결과적으로 병·의원과 약국의 폭리를 숨겨준 대신, 환자들에겐 바가지를 씌우고, 의료보험재정에는 막대한 손실을 입혀왔기 때문이다.

의보재정에 막대한 손실, 병원만 살찌워

A제약회사가 보험약가가 1,000원으로 고시된 약을 B종합병원에 절반값인 500원에 납품했다고 치자. B병원은 이 약을 입원환자에게 투여한 뒤 의료보험연합회에는 고시가대로 약값을 청구한다. 종합병원의 경우 입원환자대 보험자의 보험료 분담비율이 현재 2:8이기 때문에 환자는 200원, 의료보험연합회는 800원을 B병원에 지급한다. 결과적으로 B병원은 A사 덕분에 실거래가와 보험약가의 차액(500원)만큼을 고스란히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참여연대는 이같은 의약품비리로 인한 보험재정 손실이 연간 1조2,8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무행정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연간 3,000억∼4,000억원이 보험재정에서 새나가고 있다고 ‘공식’ 인정하고 있을 정도로 의약품 뒷거래의 폐해는 심각하다.

보건복지부가 뒤늦게나마 모든 의약품에 대해 실태조사에 착수, 약값 거품빼기에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약품의 ‘정가’ (定價)로 통하는 보험약가를 아예 실거래가 수준으로 떨어뜨리면 ‘약 가지고 장난치는’ 음성거래가 크게 줄지 않겠냐는 게 복지부의 판단이다. 약사와 의사의 직능이 확연히 분리돼, 약의 유통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의약분업(99년 7월)을 앞두고 약값 거품빼기는 당연하고도 필수불가결한 수순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약값논의에서는 정작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다. 700∼800%씩 할증을 주면서 약을 팔아도 장사가 되는 이유, 랜딩비 리베이트 따위의 구린내나는 의약품 뒷거래가 근절되지 않는 근본 원인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약값 거품빼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천명한 정책당국도, 전국 병원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뻥튀기약값 사례를 추가 폭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는 시민단체도 이에 대해선 아무런 분석과 언급이 없다.

연구개발은 뒷전, 복제품 만들기에 몰두

전문가들은 의약 부조리의 근본적 원인을 찾으려면 제약 업계 내부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의사나 약사의 비양심적인 손벌리기 때문에 생긴 ‘관행’ 이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의약비리의 뿌리는 제약회사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외국 의약품 제조성분을 ㎎의 소수점 단위까지 똑같이 베낀 ‘카피제품’ 끼리 우열다툼을 하는 것이 우리 제약시장의 현실. 2만5,000종에 달하는 시중약품중 자체기술로 개발한 신약이 단 한 종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해준다. 450여 제약사들이 연구개발 비용과 특별한 노력이 필요없는 복제품 만들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제살깎기식 과당경쟁과 뒷거래가 싹트는 것은 당연하다.

보건복지부가 매년 발간하는‘의료보험 약가기준액표’ 만 들여다봐도 이같은 문제점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성분이 ‘디메티콘 25㎎, 헤미셀룰라제 50㎎, 옥스바일 엑기스 25㎎, 판크레아틴 175㎎’ 인 소화제는 한미약품(소하자임정) 순천당제약(판개롱정) 영진약품공업(판크론정) 경동제약(아스트렌에프정) 참제약(가센정) 제일약품(멀티라정) 등 41개 제약사가 41개 제품을 시판중이다. ‘이부프로펜 400㎎’ 으로 만드는 해열·진통제 품목에는 아남제약 환인제약 반도제약 등 무려 68개업체가 경쟁중이다. 소비량이 많은 약일수록 카피제품 난립은 극심하다. 더욱이 제조성분은 똑같더라도 약값은 보험약가표에 등재된 순서에 따라 제품마다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부르는게 값’ 인 셈이다.

한 유명 제약업체 관계자는 이같은 현실을 두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 고 하소연한다. “동일한 성분의 약을 수십개 제약회사에서 동시에 생산, 판매하는 현재 구도하에서는 마케팅수단이 가격경쟁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친 가격경쟁은 우수한 원료를 사용하고 품질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생산된 제품을 시장에서 조기에 도태시키고, 저가의 저급한 원료를 사용한 제품만이 주류를 이루는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생산품목 특성화·전문화로 거품 없애야

이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우수의약품 생산기준’ (KGMP)제도는 오히려 저질 가격경쟁의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의약품에 대한 사전·사후평가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서, KGMP업체(현재 200여곳)로 선정될 경우 약품 제조성분에 대한 신고서류만으로 제품판매허가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카피제품들은 제품의 안정성이나 불순물함량, 체내활성률 등 ‘품질’ 차이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채 ‘동일약품’ 으로 시장에 나와 거래되고 있는 셈이다.

제약회사들이 뒷거래를 통해 약값에서 아무리 많은 부분을 떼어주더라도 ‘자기 몫’ 을 따로 챙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무질서한 시장구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뻥튀기약값의 거품을 걷어내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인양 몰아가는 것은 자칫 종기만 짜고 뿌리는 그대로 남겨놓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차별성이 없는 복제품을 양산해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는 제약시장의 거품부터 제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IMF이후의 다른 분야처럼 제약업계에도 생산품목특화나 전문화 등 인위적인 구조조정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그것만이 의약품 부조리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변형섭·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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