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선배님, 여기 조선진이 있습니다"

05/04(화) 19:20

아직도 일본 최고의 전통을 지닌 본인방전에서 한국의 조치훈과 류시훈의 ‘형제대국’을 기억하는 팬이 많을 것이다.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유독 일본냄새가 무릇 풍기는 본인방이란 타이틀을 놓고 뭇 일본기사들이 열심히 관전하는 가운데 치러졌던 한국인의 기개를 알린 96년의 본인방전. 그것이 3년만에 재연되고 있어 일본인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

주인공은 10연패에 성공한 조치훈과 후배 조선진. 조선진은 동률재대국까지 벌이며 천신만고끝에 도전자로 발탁되면서 현재 단일기전 10연패라는 일본 최고기록을 경신중인 선배 조치훈에게 사상 첫 메이저타이틀 도전무대에 선 것이다.

조선진은 70년 서울출생으로 이름이 미리 알려진 류시훈보다 입단도 한해 빠르고 두각을 나타낸 것도 먼저다. 이미 9단까지 올라있으니 어련하겠는가. 그러나 제2의 조치훈임을 자처하던 류시훈과 조선진중 조선진은 마치 이물질에 막힌 하수구처럼 답답한 슬럼프를 수년간 겪었다.

91년 일본신인왕전에서 일본의 뭇 신예들을 따돌리고 류시훈과 형제끼리 최고의 신인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뤄 2승1패로 우승, 신인왕에 당당히 올랐다. 신인왕은 고바야시 요다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은 모조리 거치고 간 정상 등용문. 따라서 그의 미래도 순탄하게 보였다. 그러나 조치훈과 류시훈이 초정상을 달릴 때 그는 이유없는 슬럼프에 빠졌다. 스스로의 입을 빌리면,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주위에서 그렇게 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91년에 신인왕에 오른 이가 10년이 다가도록 성적을 내지못한다는 건 ‘그렇고 그런’ 기사로 전락한다는 얘기와 같았다.

절치부심, 최근 3년동안 전통의 본인방리그에 연속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것이 계기였다. 특히 3년째 되던 올해, 그는 드라마틱하게 도전권을 거머쥔다. 초반부터 내리 3연승, 류시훈과 함께 단독선두에 나선다. 그러나 연이어 패배를 당하며 도전권에서 멀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왕리청 류시훈 등 남아있던 강호그룹을 차례로 꺾음으로써 5승2패, 동률재대국을 갖기에 이른다. 거기서 최근 실력자로 부상하고있는 히코사카 나오도를 꺾고 대망의 도전자로 최종 낙점됐다.

물론 승부로 들어가면 조치훈이 압승을 거둘 것이란 전망이 많다. 조선진도 그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의 특징이라 할 ‘물타기전법’은 누구라도 꺾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조선진은 스스로를 ‘물’이라고 말한다. 뚜렸한 기풍이 있다기 보다는 상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물처럼 쉽게 꺾이지도 쉽게 치솟지도 않는다는 얘기다. 그말은 7번승부중 최소 6판까지는 가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그가 만일 선배 조치훈을 꺾는다면 일본바둑계에서 당장 2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한때 류시훈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2인자가 되지말라는 법은 없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기사로는 조치훈 류시훈 조선진 김수준 등 4명이 있다. 그중 김수준은 조치훈의 내제자로 입문하여 아직은 새끼호랑이고, 조치훈과 류시훈은 일본의 내로라하는 강자들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정상그룹에 진입해 있다. 단 한사람, 조선진만이 9년에 걸친 도일기간중 그다운 성적을 내지못해 팬들이 안타까워 했다.

사실 600여 일본기사들 틈바구니에서 조선진은 결코 중위권이하로 떨어져 본 적은 없지만 나머지 ‘형제기사’ 들의 활약이 워낙 눈부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젠 명실공히 메이저타이틀을 향해 돌진함으로서 ‘내일은 정상’이 아니라 그 내일을 지금으로 바꾸려 한다.

이미 91년 일본신인왕에 오른 그가 3년 연속 본인방리그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결코 ‘미완의 대기’가 아님을 천명한 성적이다. 두고볼 일이다. 언제나 스타는 예고되지 않은 장면에서 빛을 발하며 나타나는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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