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속의 가장] 이 시대의 마지막 '아버지'들

05/04(화) 19:25

추락한 부권(夫權)이 부활하려는가.

IMF라는 괴물이 그 흉악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이땅의 아버지들은 초라해졌다.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공원 한켠과 지하도 바닥에서 쓴 소주와 씨름하는 모습은 그들의 고단한 처지를 상징하는 우울한 그림이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목소리를 높일 계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존경은 커녕 그들이 나눠주는 쥐꼬리만한 동정에라도 기대고 싶어했다.

그러나 TV에서 아버지들이 궐기하고 있다. “가장은 가장, 내게 힘과 권위를 되돌려다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이상 초라한 아버지로 머물 수 없다는 듯이.

“야-”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아내를 부르는 소리다. 남편의 부름을 받은 아내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요즘 흔히 보게되는 TV드라마 속의 한장면이다. 갑자기 아버지 혹은 남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KBS 1TV 일일드라마 <사람의 집>의 이순재, MBC TV 일일드라마 <하나뿐인 당신>의 김인태, 주말드라마 <장미와 콩나물>의 김성겸 등이 가부장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앞세워 집안을 휘어잡고 있다.

마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가 부활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부인들을 쥐잡듯하는 이런 가장들을 만든 작가가 박진숙(사람의 집), 박정란(하나뿐인 당신), 정성주(장미와 콩나물)등 공통적으로 여성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혹 박살난 부권에 웅크린 이땅의 남편들이 여성작가들의 눈에는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비극으로 비친 것인가. 그래서 드라마에서나마 그들에게 좋았던 시절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인가.

▲<사람의 집>의 이순재는 강원도에서 홀로 공무원생활을 하다 명예퇴직한 후 서울의 가족들과 합류한 심주사역을 맡았다. 오랜 혼자생활을 청산하고 가족들과 더불어 살다보니 못마땅한 것들이 제법 눈에 띈다. 공무원답게 융통성보다는 원리원칙에 충실하게 살아온데다 셩격마저 울끈불끈이다보니 따로 살때 나름대로 자유를 누려 온 가족을 수시로 긴장시킨다. 요즘은 큰딸네 아파트 관리사무소 영선반장으로 취직돼 무례한 아파트 주민들에게도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김인태는 봉건적 성격을 넘어 뻔뻔하다는 느낌을 준다. 75세로 설정된 극중 나이에도 불구하고 첩(윤미라) 소생으로 9세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그러고도 두눈 시퍼런 본처(정혜선)는 물론 손자까지 둔 아들 백일섭을 종 부리듯 쥐고 흔든다. 최근 정혜선이 몰래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을 알고는 노발대발한후 정혜선의 집에 발길을 아예 끊어버리는 과단성(?)을 보이고 있다.

▲김성겸은 며느리 앞에서도 아내(김혜자)를 “야”라고 부른다. 장남(전광렬)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은 성에 안차 수틀리면 닭장에 가둬두고 날밤 새게도 한다. 그러면서도 며느리 최진실이 아들 손창민을 쥐어박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 만들려면 패도 좋다”는 윤허를 내리기도 한다. 요즘은 그나마 믿었던 큰아들 전광렬의 행태에도 절망, 울화치미는게 예전보다 더하다.

92년도에 <사랑이 뭐길래>가 방영됐을 때만 해도 세간엔 “요즘 저런 남편 저런 아버지가 어디 있나”는 반응들이었다. 그로부터도 7년이나 지난 현시점에서 이런 가장들의 등장은 ‘시대착오적’이란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물론 IMF여파로 어깨처진 가장들이 즐비한 현실을 감안하면 일정부분 고무적인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뭐길래>가 페미니즘 드라마로 평가받듯, 그리고 ‘대발이 아버지’가 인기를 끌었듯이 ‘세상천지에 나만 옳은’요즘 드라마속의 아버지들도 나름대로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순재에겐 ‘반란군’ 채시라가 있다. 천방지축 둘째딸 ‘말희’역을 맡은 채시라는 자신이 편히 살고 싶다는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다. 또한 혼자 살던 생활을 벗어나 더불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해의 폭도 많이 넓어지고 있다. 특히 못해준게 많아 ‘아픈 손가락’이었던 큰딸 박성미의 순수한 존경과 사랑은 서슬 퍼런 원리원칙주의자 이순재의 성격을 순화시켜 가고 있는 중이다.

김인태에겐 요즘 유행인 ‘황혼 이혼’의 위기가 마련돼있다. ‘나이 칠십 넘어서까지 전전긍긍 살 수는 없다’며 자의식에 눈뜬 본처 정혜선의 기치에 내심‘쌤통’이라며 자녀들이 호응하고 있는 실정이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할지도 모를 위험에 놓여있다. 아직은 기세등등하지만 타협을 위해서라면 성질을 죽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듯하다.

김성겸에겐 둘째며느리(최진실)가 순화 모드로 장치되어 있다. <사랑이 뭐길래>의 하희라를 연상케하는 최진실의 배역은 불합리한 ‘시아버지 독재체제’를 영악하게 반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자포자기한 시어머니 김혜자의 파이팅을 부추겨 시어머니의 ‘정체성 회복’에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김혜자가 자신이 살아온 삶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갖춘 최진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만큼 남편 김성겸에 대한 불만도 늘고 있어 최진실과 화해하는 어느 순간 남편에 대한 일대 반격에 나설 전망이다.

드라마속의 캐릭터들은 단순화되고 전형화된다. 앞서의 세 가장들이 현실성에서 설득력을 잃는 이유다. 하지만 드라마의 묘미중 하나는 성격발전.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박제’됐던 성격들은 무너지고 풀어지게 되며 그런 모습들이 드라마의 재미에 보탬을 준다.

‘제2의 대발이 아버지들’이 변해가는 모습. 지켜볼 만하다.

김재동·일간스포츠 연예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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