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대학이 두곳이나 있다. 인천가톨릭대학교와 길병원에서 세운 가천의대가 그것이다. 강화읍에서 마니산으로 가는길에 두 대학이 멀지않은 곳에 자리잡아 고려 무신정권때 최우가 몽고침입을 피해 개경에서 천도해와 불려온 ‘강도’ (江都)의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

강화에 있는 두 대학중 하나는 인간의 정신을 지도하는 신학대학이고, 다른 곳은 육체의 병을 다스리는 의과대학이어서 뚜렷한 대조가 되고 있다.

인간문화재 양성 위한 ‘전통종교미술학과’

천주교 인천교구가 가톨릭대학을 강화도에 세운 것은 95년. 한학년 40명, 모두 100명이 안되는 초미니대학이다. 특기할 것은 98학년도부터 일반인들을 위한 ‘전통종교미술학과’ 를 설치한 것이다. 지금은 특별전형으로 뽑은 10명이 다니고 있지만 99학년도부터는 정규코스로 30명을 뽑을 예정이다. 평생을 한국종교미술에 바칠 사람들을 선발해 ‘인간문화재’ 로 키워낸다는 생각이다. 신학대학에서 유일한 일반학과인만큼 주민과의 호흡을 맞추는 장기적인 문화투자라는 생각이다. 전국 유일의 학과라 그동안 강사들도 무료로 강의를 할만치 열성이었다.

인천교구청에서 대학을 세우려고 강화군 양도면에 부지를 구입할때 땅주인들에게 ‘팔기를 원하는 가격’ 을 적어내라고 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대학이 들어온다고 좋아하던 주민들은 신학대학이라고 하자 ‘고자대학’ 이라며 실망스런 반응이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가톨릭신학대학이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지역사회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자 지금은 ‘민·학협동’ 의 대표적 사례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성공은 이 대학교 최기복 총장의 ‘신부답지 않은’ 발상에서부터 비롯됐다. 최 총장은 가톨릭도 각 지역의 역사와 환경에 맞게 전교해야하고 복음도 토착문화와의 융화를 통해 더 잘 전파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대학내에 ‘아시아복음화연구소’ 와 ‘겨레문화연구소’ 를 만들었다.

최 총장은 강화도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를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위치로 보고 있다. 우선, 강화도는 하늘과 땅의 만남의 자리다. 마니산의 참성단과 삼랑성은 단군신화와 제천의식의 신성처다. 이 민족의 영산인 마니산앞에 하느님과 인간의 화합과 일치를 기도하는 가톨릭대학교를 세운 것이다.

또한 강화도는 고금(古今)이 만나는 자리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왕궁터,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던 선원사를 거쳐 조선시대의 향교와 양명학을 주축으로한 강화학파의 전통, 그리고 근세의 병인·신미양요의 피흘림이 혼재해온 역사의 곳이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동양·한국사상과 서양사상의 대표적인 흐름인 기독교 복음이 어우러지게되면 새로운 생명문화창조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의 땅에 세워진 가톨릭 신학대학

강화도는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동·서양이 만난 자리이고 현재는 남북분단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화는 1866년 프랑스해군에 의한 병인양요와 1871년의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 그리고 조선개항을 강요한 빌미를 만든 운양호사건(1875) 등이 발생한 곳이다. 서양세력과의 투쟁에서 일방적인 피해만을 보았던 조선정부는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치 못해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합병되는 수난을 겪어야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지금도 이러한 주변4강으로 일컬어지는 강대국들과의 관계정립이 국익에 중요할뿐 아니라 분단의 현실에서는 어떻게 평화와 공존과 나아가서는 통일로 이어갈수 있을까가 중요한 국가적인 화두다.

교회사적으도 ‘백서사건’ 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생가가 있고 지금도 강화대교를 넘어서면 순교성지인 ‘갑곶돈 순교성지’ 가 나온다. 또한 근세에 들어와 미국계통의 감리교, 영국의 성공회도 이곳을 통해 많이 들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인천가톨릭대학은 성인사제양성과 아시아신학·한국신학의 정립이라는 목표외에도 남북한의 화합 나아가 중국과 아시아북방의 선교, 전인적 교육을 통한 사회인재양성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복음화연구소는 지난해 이러한 지리적·역사적인 맥락을 짚어내는 ‘21세기 북방선교의 현황과 과제’ 라는 심포지엄에서 북한과 중국선교를 위한 한국천주교회의 관심과 역할을 조명한 바 있다.

가톨릭대학이 설립되자마자 96년초 주민과 함께 해야할 사업이 생겼다. 강화도 서쪽 부속섬인 석모도에 LNG화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안이 발표됐다. 발전량이 엄청난 규모여서 우리나라 전력생산량의 3분의1에 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연히 조상대대로 농토와 갯벌을 생활기반으로 하는 강화도민들의 반발을 샀다. 서울주변에서 인천 부천 김포가 이미 공장지대로 변모해 유일하게 농·어촌환경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강화도까지 개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주민들과의 화합통해 복음화·실생활 연결

가톨릭대학은 시민연대와 함께 이 일을 추진했다. 교수단이 먼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5월14일에는 강화시민연대가 갯벌과 섬을 지키려는 ‘그린 프로젝트’ 를 발표하고 자신들이 돈을 내어 이 일을 추진했다. 결국 이 화력발전소계획은 연기되고 이어 골프장, 위락단지, 마니산 케이블카설치 등의 후속계획도 무산됐다. 겨레문화연구소는 이 일이 끝난후인 97년6월 ‘강화도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 이라는 심포지엄을 열어 이곳이 화력발전소나 골프장, 공장 등이 들어와서는 안되는 문화유적과 자연자원의 보고임을 밝혀냈다.

인천가톨릭대학의 또다른 시도는 한국천주교회가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취했던 태도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시도가 97년11월 ‘병인양요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이었고 1년뒤인 지난11월9일 인천종합문예회관에서 가진 ‘임진·정유왜란과 가톨릭교회’ 라는 심포지엄이 두번째 시도였다.

병인양요는 프랑스인 리델신부가 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를 막아내고자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인 사건이다. 이때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를 강탈해간 바 있다. 따라서 인천가톨릭대학 교수들은 이 사건이 잘못된 것이어서 프랑스는 하루빨리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해야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에 건너왔던 스페인인 세스페데스신부 등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 전쟁을 ‘불의의 전쟁’ 으로 규정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가톨릭대학교는 주민과의 화합을 통한 복음화와 실생활을 연결시키는 또다른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간 방학때마다 신학생 두명이 강화의 풍속 민담 민요를 채집하고 있다. 물론 이를 묶어 세미나를 갖고 자료집을 시리즈로 발간할 계획이다. 신학대학이라는 한계를 넘어 64년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가톨릭의 토착화’ 를 위한 끊임없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겨레문화연구소장 최기산신부 "전통의 땅과 가톨릭 교리 조화가 과제"

대학과 주민들과의 가교역을 맡고 있는 겨레문화연구소. 75년 사제서품을 받은 최기산 신부가 이를 이끌고 있다. 그간 김포 부천 부평동성당에서 본당신부도 했고 멀리 백령도에서도 목회활동을 한바 있다. 미국에서는 뉴저지주서 교포사목을 담당했고 최근에는 교구 사목국장을 지냈다.

최 신부는 “전공은 영성신학인데 이 연구소장일을 맡아 주민들과의 대화를 하다보니 완전히 환경운동가처럼 바뀌어 버렸다” 며 웃었다. 그간 석모도 화전반대, 외규장각 도서 반환 촉구성명 등 굵직한 사회문제를 주장하다보니 지금까지의 가톨릭의 입장과는 다른 경우도 있었다.

최 소장은 “강화도의 특성상 전통종교, 불교, 유학의 전통과 가톨릭의 교리를 어떻게 조화하느냐가 과제” 라며 특히 신학대학이 마니산앞에 자리잡아 이러한 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후배신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기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밤12시까지 지내는 것이 이제는 체력이 달린다” 는 최 신부는 강화전통민담·민요집 발간이 끝나면 후배신부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말한다.

남영진·주간한국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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