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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소리와 느낌으로 세상을 보는 '맹인 검객'

“빛이 있을땐 조금 보이는 것도 같아요. 희미하긴 하지만, 동그랗게 검은 부분이 머리일테고, 얼굴은 연한 살색으로 보이거든요. 또 뒤에 있는 흰 벽 색깔이랑 비춰봐서 그 아래로 어깨도 까맣고 동그랗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숨죽이고 앉아있으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다만 감으로 느낄뿐이지요.”

세상은 언제나 그에게 ‘실루엣’일 뿐이다. 선천성 망막색소변성증을 앓는 1급 시각장애인 한장교(54)씨. 바로 코 앞에 앉은 사람조차 한번 시원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그는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인생도 가졌다. 일반인들도 따기 어렵다는 검도 공인 3단의 맹인 검객. 지난 2월 99 SBS 전국 검도왕대회에 잠깐 비쳤던 그는 그 자체로 대단한 충격이었다. 대회장 입장조차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했던 틀림없는 장애인이지만 일단 시범이 시작되자 연속공격, 머리치기, 손목치기 등 고난도 기술을 한 치 틀림없이 구사해냈다. 또 1대1 경기에선 상대방의 머리치기를 가뿐히 피한 채 오히려 허리치기로 역습, 보는 이들을 탄복시켰다. 앞을 볼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정확한 가격이 가능한걸까? 그는 ‘상대의 소리나 느낌만으로도 그의 위치며 움직임까지 보인다’고 했다. 어떤 암흑속에서도 상대방의 기척이며 기습까지 송곳처럼 알아채는 사람, 허풍만 좀 더 보탠다면 영낙없이 무협지나 만화에나 등장할법한 주인공이다.

새벽 2시부터 하루 6시간씩 땀흘리는 ‘운동의 대식가’

일상 속의 그는 서울 신대방동에서 미8군 건설자재 납품업체인 대아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건물 1층엔 사무실을, 3층엔 집을 두어 동선을 대폭 줄였는데, 그렇게 아낀 시간 대부분은 운동에 쏟아붓고 있다. 종류도 여러가지. 실력은 수준급이다. 태권도 35년 수련에 공인 7단. 93년부터 시작한 검도도 이제 공인 3단이다. 여기에다 역기와 아령 등 ‘헬스’경력만 10여년, 그외 자갈위에서 뛰는 자갈지압에다 요가, 단전호흡, 기체조까지 합치면 운동량은그야말로 ‘대식가’다. 더구나 하루 두끼만 먹고도 이 많은 운동을 거뜬히 해내는데다, 그것도 남들이 다 자는 새벽 2시부터 일어나 아침 8시까지 하루 6시간이상 땀을 쏟으면서도 ‘기운이 쭉쭉 뻗친다’는 역사다. 보기엔 체형도 마르고 사뭇 차분해보이는 오십줄의 안씨지만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

검도는 93년에 시작했다. 비교적 진행속도가 완만하던 시력장애가 갑자기 내리막을 치닫던 때였다. 그렇잖아도 숱하게 달고 다니는 운동에 굳이 검도까지 보탠 이유는 당시 건강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실제로 남들에겐 얼버무려온 또다른 필요가 있어서였다.

“처음으로 솔직히 말씀드리는건데, 사실은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사업에서 부도를 맞고 한창 빚쟁이들한테 시달릴 때인데 그중 사채업자들이 보낸 해결사들은 걸핏하면 칼을 들고 찾아와 괴롭혔거든요. 우선은 제가 빚을 갚지 못한 잘못도 있고, 또 나도 운동을 한 사람이라 자칫 잘못하면 급소를 다치게 할까봐 처음엔 내내 맞기만 했는데, 하도 심하게 맞고 당하니까 나중엔 숨이 콱 멎는게,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태권도로 방어도 시도해봤지만, 그땐 이미 시력이 나빠질대로 나빠진 뒤라 별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태권도는 원래 몸과 몸이 직접 부딪치는 운동이라 공격이 순식간에 이뤄지거든요. 그러다보니 아무리 제가 빨리 팔을 뻗는다고 뻗어도 상대는 이미 더 빠르게 나를 치고 있는거예요. 늘 한대 먼저 맞고 난뒤에 허겁지겁 방어를 하는 꼴이었죠. 그래서 검도를 배웠습니다. 검도를 하면 우선 우산이나 지팡이로도 공격이나 방어를 할 수 있고, 또 장비가 있기 때문에 상대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생겨서 그만큼 내가 자세를 갖출 시간을 얻으니까 태권도보다 훨씬 유리했지요.”

목숨 지키기위해 시작한 운동, 밥먹고 세수하듯 훈련

수련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했다. 검도는 급소를 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스포츠. 그러나 사범의 설명을 듣고 따라 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보니 처음부터 동작 하나하나를 사범이 직접 손으로 붙들어 가르쳐주는 것으로 어렵게 검도를 익혔다. 그러나 실수도 많았다. 대충 이쯤이겠지 싶어 힘껏 죽도를 내리치다가 엉뚱한 곳을 잘못 치고는 곧바로 지적을 받기도 일쑤. 그래도 끈기는 타고났다. 한번도 연습을 거르는 법도 없었고, 한 번 배운 것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모양을 다시 그려가며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그의 말대로 ‘밥 먹고 세수하듯이’ 도장에 다니며 훈련하기를 6년. 공인 3단까지 오르는데도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활에서도 웬만한 요령은 다 터득했다. 수첩이란게 도움이 안되니 꼭 필요한 전화번호나 통장 계좌번호 200_300개는 아예 깡그리 외고 다니고, 전화기의 돌출식 버튼을 한번 더듬는 일도 없이 손에 익혀두었다. 회사경영이나 직원관리도 거뜬. 쓰거나 읽어야 할 서류는 최대한 간소화했고, 정례회의땐 직원들에게 각자의 보고서를 읽히면 그만이다. 물론 다른 회사 사람들과 회의때 물컵을 깨뜨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몸에 부딪치는 것이 다반사지만, 대개는 장애인인 그의 실수를 이해한다.

반면에 장애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듣고 느끼는 감각은 오히려 발달된다는 덤도 있다. 얼마전부턴 앞으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를 대비해 이틀중 하루쯤 아예 눈을 감거나 불을 켜지않고 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처음엔 곧잘 벽에도 부딪치고 실수도 잦던 것이 이젠 시멘트 벽이랑 나무 문짝의 기운이 서로 다르다는 걸 느끼는 수준까지 올 만큼 일취월장. 밝은 눈은 없어도, 예민한 귀와 뛰어난 육감으로 그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

갑절의 인생경험 “세상일, 잘 보면 답은 반드시 있다”

넓게 보면 남들보다 갑절의 인생을 경험하는 셈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신체 건강한 일반인으로, 나이 들어서는 장애인으로, 두 세계를 건너왔다. 자신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초등학교 2학년때. 부친 손에 끌려간 서울 무교동의 한 안과에서 처음으로 망막색소변성증이란 이름을 들었다. 그땐 단지 밤 눈이 어둡고, 시야가 자꾸 좁아지는 것이 꼭 큰 호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 앞이 답답했다. 증세는 서서히 나빠지더니 걸핏하면 넘어지거나 다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서울사대부고 시절엔 언젠가 통학기차를 타려고 철길을 건너다 맨홀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바로 기차가 진입, 철길안에 갇힌 그를 두고 주변의 역무원들 사이에선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황급한 정지사인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그의 머리위를 통과했다. 다행히 맨홀 속에 몸을 웅크린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직후 역무원들과 부모님께 불려가 엄청난 꾸지람과 걱정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밤, 정말 심각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야단을 맞아서가 아니라 ‘이런 꼴로 살아서 뭐하나’라는 비참함 때문이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유난히 독서량이 많았던 그는 대학 2학년때 ‘정신력의 기적’이란 책을 읽은 뒤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 책은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항상 마음속에 외우고 다니면 결국 목표가 이뤄진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장 그는 ‘가정과 사회, 국가, 세계에 봉사하는 대실업가가 되겠다’며 매일같이 주기도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 효과였는지, 대학시절은 해 볼것 다 해보고, 태권도부원에다 학생회장으로도 활동하며 즐겁게 지냈다. 겁나는 것도 없었고,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그러나 사업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대학졸업후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봤지만 손대는 것마다 줄줄이 실패였다. 그러다 공예가구사를 내면서 서서히 돈을 모으기 시작해, 76년부터 지금의 군납사업으로 발을 들였다. 한때 상도동에서 140여평 부지의 사무실을 쓸만큼 잘 나가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 90년에 부도를 맞고 15억원의 빚더미에 앉았다. 남들처럼 피하거나 도망다닐줄도 몰랐던 우직한 그는 채권자들을 제 발로 찾아다니며 ‘벌어서 반드시 갚을테니 기다려달라’며 사죄하고 설득하기도 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일’은 그때 다 당해보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그 많은 빚을 다 청산했고, 스스로도 그 일이 놀랍기만 하다.

“제가 인생에서 배운건 모든 질문에는 반드시 답이 있더라는 겁니다. 특히 단전호흡이라든가 검도 등을 하면서 맑은 머리로 조용히 앉아 머릿속에 상황이나 질문을 넣어보면 꼭 답이 떠오르지요. 다른 분들도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을 잘 돌아봤으면 합니다. 잘 보면 반드시 답은 보이게 돼있으니까요.”

태권도·검도 7단, 7개국어 마스터 등 ‘쓰리세븐’이 목표

그의 문제를 푸는 방식도 점점 진보하는 모양이다. 한 번에 한가지도 효율이 떨어지는지 그는 요즘 동시에 여러 문제를 풀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목표는 ‘쓰리세븐’석권. 태권도 7단에 7개국어 마스터(영어는 이미 달변 수준, 운동중 어학테이프를 들으며 일어와 불어 등을 공부하고 있다), 또 검도도 7단이 목표다.

가끔 부인과 산책 삼아 집에서 가까운 보라매 공원도 자주 들르는 그는 언젠가 저녁길에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야단치다가 집단으로 둘러 싸인적이 있다. 밖에서 지팡이를 휘둘러본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다짜고짜로 육탄돌진하던 한 녀석을 ‘살짝 건드리자’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투항. 그때 그의 차분한 일갈. “내가 뭐랬어. 난 평생을 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미리 경고했지. 알만한 젊은이들이 점잖게 말할 때 알아듣지 않고 말이야…” 물론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얘기를 해봐야 그들이 과연 믿기는 했을까, 의문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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