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자식들에게 어떻게 재산을 물려줬을까. 딸이라고 덜 줬을까, 아들이라고 더 줬을까. 장관격인 판서의 월급은 얼마나 됐으며 어떻게 월급을 수령했을까. 교육열은 어느 정도였을까. 국가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사후에 정부에서 내리는 시호(諡號)는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될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고문서 전시회가 ‘한 가문을 통해 본 조선 후기의 생활문화전’ 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다. 28일부터 11월 19일까지.

전시품은 지난 96년 충남 부여의 창원(昌原) 황씨(黃氏) 2대 가문 추포가(秋浦家)와 아술당가(蛾述堂家)에서 기증한 1007점. 영정, 호패(일종의 주민등록증), 인쇄용 목판 등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고문서다.

박물관 최순권 연구원에 따르면 창원 황씨는 황석기를 시조로 서울과 강화, 양주, 부여 등 경기와 충청지역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황대수 황신 황일호 황윤이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유력한 양반가로 발전했다. 특히 기호 사림의 종장인 이이와 성혼, 송시열, 송준길 등과 누대로 정치·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서인 노론 계열의 정치색을 띠었다.

추포가는 추포 황신(黃愼·1562∼1610)을 중시조로 하는 가문. 그는 성혼과 이이의 문인으로 임진왜란때 일본에 통신사로 가 외교에 공을 세웠고 호조판서를 지냈다.

아술당가는 아술당 황진(黃璡·1634∼1666)을 중시조로 하는 가문. 그는 일찍부터 벼슬길을 사양하고 당대의 석학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사사, 성리학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박물관측은 2년에 걸친 분류조사 작업 끝에 이번 전시회를 마련했다.

이들 고문서는 16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400여년간 조선 중·후기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

땅을 빌려주고 임대료조로 받는 곡식의 수량을 기록한 ‘의최고’ (意最高)나 토지매매문서 등을 통해 특정 시기의 경제실상을 알 수 있고, 의식주, 의례, 교육, 신분·사회제도, 가족·친족관계, 촌락조직 등 당대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런 자료가 중요한 것은 한 시대의 생활상을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만 해도 이처럼 특정 가문의 문서를 상세히 연구해 전근대 사회의 생활상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정치사나 문집 연구에 치우쳐 당대 사회상에 대한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몇년째 이런 고문서를 한 데 모아 영인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실적은 극히 미미하다.

1563년(명종 18년) 6월 작성된 재산상속 기록 ‘화회문기’ (和會文記)를 보면 황대유를 비롯한 6남매에게 노비를 똑같이 나눠주고 있다. 다만 장남 황대유에게는 제사비용조로 집 1채와 논 20마지기를 더 지급했다.

이이의 답안지 등 우리나라와 중국의 과거급제자 답안을 한 데 모아 과거공부용으로 편찬한 책도 있고 일기, 유서, 의금부(지금의 검찰) 관리의 모임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금오좌목(金吾座目)도 눈에 띈다.

특히 정이 가는 것은 편지류. 옛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마음씀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안 대소사를 챙기면서 자상하게 격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당대의 명사들끼리 안부를 묻는 내용도 있다. 황하신은 아들들에게 과거준비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면서 시경(詩經) 9권을 다 읽고 10권에 들어갔느냐며 구체적인 진도를 묻기도 했다. 관사에 남아 잇는 손자들에게는 길이 나빠 데리고 오지 못해 아쉽다며 독서와 글씨쓰기, 작문을 착실히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아술당가 13대 종손 황민환(55·한국감정원 고객업무부장)씨는 “황씨 고문서가 일개 가문만의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며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보존에도 좋고 연구에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아 기증했다” 고 밝혔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도 목숨보다 더 귀하게 간직하라고 당부하셨지요. 일제때는 일년에 한두번 바람을 쐬는데 일인들이 와서 팔라고도 많이 했습니다. 선조들이 임진왜란때부터 얼마나 고초를 겪으셨는데…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지요. 6·25때는 큰 독 안에 넣고 땅 속에 묻은 뒤 겉에는 담뱃잎으로 위장해 분실을 면했습니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