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열린교육] 이대로 열어놔야 하나

서울 강북에 사는 학부모 박용호(45)씨는 요즘 애들 교육 때문에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 황당해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성륜(7)이는 과제물을 일일이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고, 중학교 2학년짜리 채륜(13)이는 리포트를 거의 대신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성륜이의 경우를 보자. “학기초에 1학년용 1년치 준비물을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사물함에 보관해 두고 쓴다고요. 양면색종이 200매, A4 용지 1권, 양면색도화지 40매, 크레파스, 물감 등등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위도 아무 것이나 되는 게 아니고 정해진 규격이라야 한답니다. 풀도 물풀은 안되고 특정 회사에서 나온 딱풀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6,000∼8,000원짜리로 이런 준비물이 일괄해 들어 있는 케이스를 팝니다. 물론 꼭 이 상자를 사야하는 건 아니지만 집에서 형이나 언니가 쓰던 것을 준비해가면 아이들 사이에 왕따 당한다는 겁니다. 바둑알도 흰 것 10개, 까만 것 10개를 가져오라는데 집에 있는 것을 가져가려니까 포장 세트로 된 것 중에서 바둑알만 빼고 사면 더 비싸집니다. 학교에서는 열린교육을 위해 아이들이 직접 물건도 만들어보고 실험도 한다는 취지라는데 준비물도 스스로 준비 하고 해야 응용력이 커지는 것이지 학교 편의를 위해 이렇게 획일적으로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게 어떻게 열린 교육이 되겠습니까? 열린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지요.”

이런 하소연을 하는 학부모가 많다. 그러니 아예 예전처럼 기성회비를 거둬서 학교에서 일괄구입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서울 홍은2동에 사는 주부 이정일(37)씨도 비슷한 경험담을 밝힌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이가 빈 우유팩 2개로 주사위를 만든다는데 우유팩을 붙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사위 숫자 표시는 문방구 앞에서 색종이로 된 숫자 무늬 스티커를 판다는 겁니다. 그걸 수업시간에 뜯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지요. 몸통은 부모가 만들고 무늬는 완제품을 뜯어붙이는 게 무슨 실험교육인가요? 식물 모종을 가져오라는 것도 꼭 어떤 식물이어야 한다고 지정해주기 때문에 결국은 문방구에서 규격품으로 나온 것을 사가게 됩니다.”

채륜이의 경우는 왜 박씨를 ‘열받게’ 할까?

“최근 중학교에서 내신평가를 한다며 과제물을 엄청나게 많이 내줘요. 중 1∼2년생들한테 대학생 리포트 내주듯이 하더군요. 얼마전에 ‘봉건제도의 문제점과 내가 그때 살았으면 어떻게 했을까’를 주제로 A4 용지로 4장을 써오라는 겁니다. 글자를 크게 해서 실질적인 양을 줄일 것을 염려해 글자 크기도 몇호로 하라고 정해줍니다. 이걸 중학교 2학년짜리가 어떻게 혼자 합니까? 결국 제가 거의 대신해주다시피 했습니다. 숙제가 이것만이 아니고 영어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든가 유적지 어디어디를 답사하고 보고서를 써오라는 등 그걸 전부 저 혼자 하도록 놔두면 정말 살 수가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학교 편의, 교사 편의입니다. 그럴 듯하게 컴퓨터에서 컬러로 프린트 하고 이것 저것 자료를 첨부하면 우선 시각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교사들이 그 많은 학생이 해온 그 많은 양의 리포트를 언제 일일이 다 읽고 채점을 할 수 있겠어요. 양 많고 화려하면 점수 주는 거지요. 부모가 안 계시거나 컴퓨터 없어 인터넷도 못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박씨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요즘 학교 주변 사설 학원에서는 수행평가용 과제물을 대신해준다는 현수막 광고를 내건 곳이 많다. 일부 학원 강사들은 “숙제를 대신해주지 않으면 학생을 모집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컴퓨터가 없는 학생들은 친구에게 빵을 사주는 대신 컴퓨터로 숙제를 뽑아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설움을 겪어야 한다.

시험이라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평가하는 대신 학생의 특성과 발달사항을 서

술식으로 기록해 학습과정을 제대로 평가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수행평가가 시행 초기부터 파행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런 초·중등학교의 문제는 상당부분 ‘열린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린교육은 획일화된 암기 위주의 기존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발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학생 수준과 교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학습법을 적극 활용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시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문제점은 열린교육의 이념은 그럴 듯한데 그 실제에 있어서는 뚜렷한 형태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도 감지된다.

열린교육은 진보주의 교육철학을 토대로 미국에서 발전된 교육방법.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무조건 암기 보다는 이해와 지식 활용법을 중심으로 창의성 개발을 강조하는 교육이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중반 서울 영훈, 운현초등학교에서 처음 시작됐다. 특히 90년대 들어 열린교육연구회를 중심으로 교실혁신 운동이 활발히 진행된 후 90년대 중반부터는 교육부가 추진하는 교육개혁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교육부는 97년부터 재정 지원 등을 통해 일선 초·중등학교에 열린교육을 적극 권장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경우 초등학교 47개교 등 열린교육을 실시하는 70개 시범학교에 각 2,000만원씩을 지원하고 있다. 이중 30개교는 새로 지정된 곳이고 40개교는 시범 2년째다. 오는 10월에는 1년 이상 시범학교를 운영한 성과를 열린교육 실천 사례 연구발표대회를 통해 점검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열린교육을 위한 원격 영상 정기토론회나 우수 사례 중심의 강사 요원과 전문직 연수도 실시한다.

교육부는 ‘부산광역시교육청이 지난해 열린교육 시범학교와 일반 학교 6개교씩을 비교한 결과 열린학교가 학업성취도 면에서 국어는 6%, 수학은 10.4% 높게 나타났다’며 열린교육이 성공적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교육부도 열린교육이 △적성과 수준에 따른 학습집단 편성을 위한 다양한 교실공간과 교사가 부족하고 △초·중등학교간 풍토및 학습방법의 차이로 학생들의 부적응 현상이 초래된다는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큰 방향은 대체로 올바른 것으로 보고 열린교육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보는 일선의 시각은 썩 긍정적이지 않다.

김대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위원은 “한 과목을 교사 여럿이 팀을 짜서 학생들을 수준별로 나누어 가르치고, 교실 벽을 터서 학급 구분을 없애고 학과 중심으로 개별 교육을 하며, 우수한 그룹과 열등한 그룹을 나누어 각기 수준에 맞는 교재를 나눠주고 과제중심으로 가르치는 등 미국식 열린교육을 하자면 반드시 나름의 토양이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겨우 흉내낸 것은 일부 초등학교에서 실시한 ‘벽 트기’였는데 그나마 국정 교과서에 맞춰 ‘수업 따로, 열린교육 따로’운용돼서 어린이들에게 부과되는 숙제는 영락없이 ‘엄마 숙제’로 둔갑하고 말았다. 그런 지경이니 중학교는 열린교육의 ‘열’자도 흉내도 내지 못했고 수준별 이동수업(우열반)을 열린교육이라고 우기고 또 그렇게 이동수업을 해야 교육청은 학교에 열린교육 점수를 주는 촌극이 버젓이 자행됐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동안 실시된 중·고교의 열린교육은 열린교육이 아닌 ‘이상한 수업’ 형태다. 흔히 열린교육 세미나에서 열린교육으로 소개되는 수업방식은 멀티미디어 기재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수업이지 그 자체가 열린교육은 아니다.”

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고 수업 외 업무가 과다해 열린교육이 사실상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많다.

특히 학생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울 Y중학교 3학년 김수행군은 최근 PC 통신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하소연한다. “요즘 중고생들은 시험공부 하랴 밤새 수행평가 숙제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시험공부 하려면 숙제가 산더미 같이 밀려 있고 숙제를 포기하고 시험공부를 하자니 수행평가 점수가 막대해 정말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제발 수행평가를 100%로 하든지 시험을 100%로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해주세요. 괜히 어중간하게 해서 학생과 선생님들 골병 들게 하지 마시고요.”

외국의 경우 학생 개인의 특성을 중시하는 개별화 교육 등 열린교육을 하려

면 한 학급의 규모가 최대 21명은 넘지 않아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그러나 한국 초등학교의 실정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분교 수준의 극히 일부 벽지 학교가 아닌 다음에는 35명 내지 40명 넘는 곳이 대부분이다. 열린교육 성공사례로 보고되는 초등학교도 대개 소규모이거나 부유층 자녀가 많은 학교들이다.

열린교육을 하려면 교사들의 수업준비가 충분하고 교재도 다양해야 하는데 업무처리로 상당 시간을 보내는 교사들로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실은 따라주지 않는데 구호만 외쳐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열린교육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학생은 아무 생각없이 따라 외우는 전통식 주입 암기 교육의 폐해를 고발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학교의 권위주의적 운영을 반성하게 하는 데도 적지 않은 몫을 했다. 특히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바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 학교의 현실은 구호로서의 열린교육과는 많은 차이가 있고 열린교육의 모습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제 열린교유의 실상과 개선방향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광일 주간한국부 기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20년 05월 제2829호
  • 이전 보기 배경
    • 2020년 05월 제2829호
    • 2020년 05월 제2828호
    • 2020년 05월 제2827호
    • 2020년 05월 제2826호
    • 2020년 04월 제2825호
    • 2020년 04월 제2824호
    • 2020년 04월 제2823호
    • 2020년 04월 제2822호
    • 2020년 03월 제2821호
    • 2020년 03월 제2820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이탈리아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