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쓰던 거북선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아무도 모른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천안 독립기념관 등에 전시된 재현 거북선은 이순신 사후 2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정조 당시의 거북선 모형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쓰던 거북선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거북선도 후대에 개량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같이 싸운 조카 이분의 기록을 보자. “공(이순신)이 전라좌수사를 지낼 때 장차 왜적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큰 전선을 창제했다. 배 위를 판자로 덮고 덮개 위에는 열십자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창칼을 꽂았다. 뱃머리에는 용머리를 달고 꼬리에는 거북 꼬리를 달았다. 대포 구멍이 앞뒤와 좌우 모두 각각 6개씩 나 있고 큰 탄환을 쏜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거북 잔등을 덮어 창칼을 가리고 함대의 선봉이 돼 나아간다. 적군이 배에 오르거나 뛰어내리면 창칼에 찔려 죽게 되고 적선들이 엄습해오면 한꺼번에 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않는 곳이 없었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 거북선으로 공을 세운 것이 많으며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이름을 거북선이라 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휘하 장수 나대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종때 시험제작했다는 구선(龜船)을 이노베이션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거북선은 당시 조선 해군의 주력함인 판옥선(板屋船)에 거북등딱지 모양의 덮개를 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명종 10(1555)년 순수 조선 기술로 개발한 혁신적인 군선으로 임진왜란 해전 승리의 주역이었다.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는 “판옥선은 일본의 주력함인 아다케(安宅), 세키부네(關船), 고바야(小早)보다 구조 선형 기능 크기 면에서 우수했다”고 지적한다. 일본 전함의 전통에 대해서는 이미 성종때 신숙주가 그 특징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신이 왜선(倭船)을 보건대 판자는 매우 엷은데다 철못을 많이 쓰고 배밑은 좁고 위는 넓으며 양단은 첨예한 고로 경쾌해서 왕래에는 편리합니다. 그러나 배가 동요하면 못구멍이 넓어져 물이 새고 썩기도 쉽습니다. 우리나라 군선은 몸집은 무겁고 크나 나무못은 습하면 점점 더 빽빽해지고 선체는 튼튼하고 치밀하여 10년을 쓸 만 합니다. 또 왜선보다 3분의 1이나 높은 고로 싸움에 이롭습니다.”(성종실록 4년 12월 임오일조)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그대로 살린 돌격전용 특수 군선으로 노꾼과 전투원등 승선자 전원을 방탄판자로 보호하는 장갑함이다. 당시로서는 가공할 화력에 용머리 아래 달린 귀신머리 부분으로 적선을 들이박아 깨뜨리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6월 사천포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투입, 일본함대를 무찌르고 올린 장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입으로 포를 쏘게 되어 있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비록 수백척의 적선 속이라도 쉽게 치고 들어가 포를 쏘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거북선은 총통(포)류와 함께 당시 조선군의 우수한 무기체계를 상징한다.

여기서 거북선에 대한 일반의 오해 몇가지를 바로 잡아보자.

첫째 거북선은 임진왜란때만 쓰였다? 아니다. 임진왜란때는 기록에 등장한 것만 3척이지만 영조때는 14척, 정조 6년에는 40척이 취역하고 있었다.

둘째 거북선은 철갑선이다? 아니다. 일본군측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측 기록에 거북선을 철로 장갑했다는 기록은 없다.

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은 90년 노태우 대통령이 거북선 찾기운동을 적극 추진하라고 지시한 이후 많은 작업을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남해안 푸른 바다 속 어딘가에 거북선은 있을까?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남천우 박사는 “바다 밑에 거북선은 없다”며 “인양 작업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단언한다. 나무배이므로 난파되거나 격파돼도 물 속에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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