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케네디, 닉슨, 朴正熙

07/27(화) 10:45

두장의 사진. 1963년 백악관 집무실 책상밑에서 장난스럽게 내다보는 두살 바기 존 F 케네디 2세의 사진. 11월25일 아버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 마차에 거수경례하는 세살이 된 케네디 2세의 사진. 그는 최근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두장의 사진은 50대이상의 세계인들에게는 20세기를 넘기면서 20세기의 분수령이었던 ‘60년대’를 생각케 한다.

케네디 2세의 아버지 케네디가 60년 11월, 43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경쟁자였던 닉슨부통령과의 표차는 겨우 11만3,803표였다. 미국 대통령 사상 첫 가톨릭대통령. 당선 18일만에 첫아들을 봤다. 케네디 2세로 부르기 힘들어 ‘존·존’으로 불렀다. 케네디 2세는 95년에 만든 잡지 이름대로 ‘조지’라고 불리어지기를 바랬지만 그에게는 ‘케네디가(家)’적자의 굴레가 이미 지워졌다.

케네디대통령은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현상유지자였고 현실주의자였다. 바람둥이였고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그는 월남파병의 테이프를 끊었다. 또한 흑·백 통합의 강력한 첫 시도자였다. 그는 소련에 앞서 달에 사람을 보내는 아폴로계획의 입안자였고 실행자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50대이상의 세계인들에게 ‘60년대’의 출발신호를 울린 사람으로 그의 아들실종·사망의 배경화면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 두장의 사진중 잊혀진 ‘60년대’의 인물이 있다. 케네디대통령을 생각하면 닉슨을 생각해 내야한다. 그가 케네디와 맞설 때 47세였다. 1947년에 닉슨과 케네디는 함께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상원은 닉슨이 50년에, 케네디가 53년에 됐다. 모두 반공적이었고 우익성향이었다.

케네디가 일리노이와 텍사스에서 선거인단 승리로 당선이 되자 닉슨은 한때 선거 무효소송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포기했다. 1년반이 걸리는 선거소송. 그 결과가 가져오는 국론의 분열, 미·소의 냉전을 맞서기 위해서는 강한 미국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닉슨은 말년에 모니카 크로우니라는 여자보좌관에게 ‘보도관제’(?)를 요구하며 많은 일화를 말했다. “나에게 케네디를 이야기하는 것은 내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케네디를 선망하거나 질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치 않다. 나는 케네디와 긍정적인 경쟁관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케네디는 대통령 재임중 닉슨부부를 백악관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닉슨은 대통령이 된뒤 백안관의 제트스타기를 뉴욕으로 보내 재클린과 13세의 케롤라인, 열살의 ‘존·존’을 백악관에 비밀리에 초대했다. 케네디의 초상을 새로 거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재클린은 비밀방문을 원했고 닉슨은 이를 들어주었다.

캐롤라인은 “너무나 음식이 맛이 있었다”고 편지썼다. ‘존·존’은 “백악관뜰에서 처음 타본 미끄럼틀을 보여준 것”을 고마워 했다.

닉슨은 은퇴후 ‘존·존’이 3수끝에 변호사가 되자 축하메시지를 보내 “나는 네 아버지가 무척 기뻐할 것으로 느낀다”고 전했다. 그는 90년대에는 “결코 정치판에 끼어들지 말라고 ‘존·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케네디 2세의 두장의 사진 저쪽 뒷편에는 한국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사진도 있을 것이다.

박의장은 61년 11월14일 워싱턴으로 가 검은안경을 끼고 평복차림으로 케네디를 만나 재클린을 소개받았다. 케네디는 박의장이 ‘위로부터의 혁명’을 해냈고 그의 특별보좌관인 로스토우교수의 ‘후진국 단계적 발전론’의 이해자임에 호감을 느꼈다.

케네디는 두차례 회담에서 미국의 안보지원과 가능한 한의 원조를 약속했다. 박의장은 자립 자조의 경제, 원조의 효율적 배분을 강조했다. 나중에 비밀해제된 자료에 따르면 박의장은 케네디에게 “베트남전에 적어도 5만명의 한국군을 지원이나 동맹군으로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케네디는 이에 무척 고무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정연장에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며 베트남의 고 딘 디엠을 제거함으로써 박의장에게 ‘위로부터의 혁명’도 부패하거나 민주적이지 않을 때는 타도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떻든 케네디 2세의 사망을 계기로 세기말에 던져준 63년의 두장의 사진은 한국민에게는 박대통령을 생각케 하고 그의 2인자였던 JP를 다시 보게한다.

미국민은 케네디가(家)는 미국의 로열페밀리가 아님을 이번 사고로 실감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민은 오늘이 ‘60년대 5·16’의 연장이 아님을 그 사진에서 실감해야 할 것이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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