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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공직자 10대 준수사항 유감

사례 1. 80년 2월 초 필자가 결혼했을 때 아버님은 축의금 장부를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분들이 너희들을 위해 도움을 주신 분들이시다.’ 당신이 계시는 동안은 알아서 할테니 이후는 잊지말고 꼭 부조를 해야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례 2. 한 사람이 같은 고향인 직장 후배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는 10여년전 후배의 부친 회갑연 때 3만원을 부조했습니다. 그런데 후배는 그 선배의 딸이 시집갈 때 2만원의 축의금을 냈습니다. 선배의 전화는 ‘칼’같았습니다. “자네 혹시 부조장부를 갖고 있으면 한번 보게. 사람이 그러면 못쓰는 거야.” 이 이야기가 그들의 직장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사례 3. 한 공무원이 아들을 장가보냈습니다. 그가 ‘관할’하는 곳은 업소 1,000여개가 모여있는 상가입니다. 인접한 업주들끼리 축의금 액수에 대한 의견교환도 있었습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후환’에 공동대처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지요. 이날 혼주의 ‘관내’에서 들어온 축의금만 개략 5,000여만원이었습니다. 하객들은 ‘쌓이는 봉투’에 혀를 내둘렀지요.

사례 4. 지난해 일입니다. IMF사태로 퇴출을 통보받은 50대가 회사측에 애원했습니다. 딸의 결혼날짜를 잡아두었는데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근무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몸담은 직장에서 쫓겨나는 자신의 아픔보다 ‘자식’이 앞섰습니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요즘 직장인들은 정년전에 퇴출당한 직장 선배들의 청첩장을 간혹 받습니다. 그 선배들은 직장생활을 하는동안 후배들의 경조사에 어김없이 월급봉투에서 ‘원천징수’를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부모의 사랑이 내리사랑이라고 하듯이 직장 동료들간의 경조사도 비슷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퇴출당한 전 사우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요.

사례 5. 50대 한 공무원은 최근 딸에게 차마 못할 얘기를 했습니다. ‘결혼을 3년만 늦춰라’는 것이었습니다. 외아들인 그는 정부가 공직자 10대준수사항을 발표했을 때 앞이 깜깜했습니다. 집으로 찾아와 인사까지 한 ‘사위’의 얼굴, 안절부절할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지요. 그는 결혼후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부모님이 생존해 계셔서 30년 가까이 ‘주기만’했지 한번도 ‘되돌려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가 대략 계산한 직장내 경조사 ‘적금’은 2,500여만원, 직장밖 친지들에게 한 것을 합치면 4,000만원이 훨씬 넘습니다.

위 사례들 대부분은 최근의 공직사회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공직자 10대 준수사항으로 ‘수십년을 넣어온 적금이 깨어지는 상황’에 대한 불만과 조만간 닥칠 집안의 경조사에 대한 현실적인 걱정들이지요. 사례 3을 보면 정부의 조치는 백번 옳습니다. 공무원이 소위 ‘관내’에 청첩장을 돌리는 것은 사실상 수금행위로 이는 ‘뇌물성’이 다분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직사회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부조는 품앗이입니다. 품앗이는 가장 합리적인 우리의 전통이자 미풍양속이지요. 그같은 미풍양속이 일부에서 악용한다는 이유로 본질이 매도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공직자를 ‘도매금’으로 죄인시하거나 한순간에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리는 그같은 대책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정부가 경조사비 부분 적용대상을 1급이상으로 상향하는등 조정할 계획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가 않습니다. 철저한 검토도, 민심을 제대로 읽으려는 노력도 없는 탁상행정으로 국민들의 불신을 자초했습니다. 특히 공직자들이 정부가 마련한 제도를 불신한다면 나라가 제대로 될리 없습니다.

이번 대책은 ‘고위 공직자의 도덕적 해이’에 따른 최근 사건들로 말들이 많던 차에 갑자기 튀어나왔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민심을 제대로 읽겠다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부활하는 과정에서 입니다. 공직자들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공직자 10대 준수사항을 고치는 것은 좋으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깨끗한 공직풍토입니다.

개선책은 더욱 합리적이면서 부정부패를 제대로 차단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빈대는 잡되 초가삼간을 태워서는 안됩니다.

정재룡·주간한국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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