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뒤의 신경전’. 지난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 사이의 움직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 저녁 청와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총리 박태준 자민련총재 등 ‘DJT 3인’ 을 비롯 두 여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DJP 단일화 합의’ 1주년을 축하하는 만찬 모임이 열렸다. 겉으로는 첫돌 잔치답게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김 대통령은 “무엇보다 김종필 총리가 살신성인의 중대결단을 해준 것을 다시 높이 평가한다” 며 JP를 추켜세우자, 김 총리는 “양당 모두의 뜨거운 우정을 다지는 기회로 삼자” 고 화답했다. 그럼에도 자민련이 당운을 걸고 추진하는 내각제 개헌을 비롯 단일화 당시 약속은 전혀 테이블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자민련 관계자들은 “그런 자리에서 민감한 현안을 거론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있다” 면서도 김 대통령이 내각제에 대해 전혀 운을 떼지 않은데 대해 내심 섭섭해하는 표정이었다. 김 총리는 이날 만찬을 끝낸 뒤 자민련 당직자들과 별도로 뒷풀이 술자리를 갖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가 올 것” 이라며 내각제 추진 의지를 내비쳤다.

향후 권력구조 논의, 풍랑 예고하는 듯한 모양새

만찬에 앞서 자민련은 이완구 대변인 이름으로 단일화 1주년 기념 성명을 내고 “국민들에게 약속한대로 내각제 개헌을 실현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완성하고 공동정부 앞에 놓인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한다” 며 내각제 약속을 상기시켰다. 반면 국민회의측은 대선 합의문을 거론하는 논평을 전혀 내지 않아 대조를 이뤘다.

또 청와대 만찬도 자민련측이 먼저 분위기를 잡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단일화 합의 1주년 하루 전날인 2일 오전 김종필 총리측은 국민회의·자민련 고위당직자 16명에게 “3일 모호텔에서 열리는 총리 주재 기념 만찬에 참석해달라” 고 연락했다.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들은 김 대통령이 “내가 저녁식사를 내는게 더 좋겠다” 는 뜻을 밝혀 청와대 만찬으로 형식이 바뀌었다. 이에대해 정가의 한 관계자는 “신부가 신랑없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려다 뒤늦게 신랑이 주최하는 형식으로 바뀌어 최소한의 모양이 갖춰진 셈” 이라고 뼈있는 조크를 했다.

이같이 단일화 합의 1주년을 둘러싸고 양측이 줄다리기를 벌이는 모습은 향후의 권력구조 논의가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개헌론의 키를 쥐고있는 김 대통령과 국민회의측의 복안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어 내각제 문제는 짙은 안개속에 가려져있다. 현재 국민회의측의 공식입장은 ‘대선당시 약속을 지킬 것이지만 지금은 경제회생에 전력하기 위해 내각제를 거론할 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회의 한화갑 총무가 ‘비(非)호남 대통령후보론’ 을 거론하고 대통령 자문교수들이 ‘민주대연합론’ 등을 제기하는 등 국민회의 주변에 내각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개헌작업 ‘자민련 뜻대로’ 는 어려울 것

내년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개헌논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각제에 대한 양당 합의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월 3일 당시 각각 국민회의, 자민련 총재였던 김 대통령과 김 총리가 서명한 합의문의 골자는 ▲국민회의, 내각제 당론 당헌에 명시 ▲공동정부 출범 즉시 양당 내각제추진위 구성 ▲대통령이 개헌안 직접 주도 발의 ▲99년 12월말까지 내각제 개헌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선하고 수상이 국정전반을 책임지는 순수내각제 채택 ▲새정부의 대통령과 수상 자리는 자민련이 우선 선택 등이다. 이 가운데 국민회의가 내각제 당론을 채택한다는 조항은 대선전에 이미 실현됐다. 하지만 내각제 추진위 구성은 경제회생에 국력을 결집하기위해 내년초로 연기하기로 DJT 3자 사이에 조율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련은 내년초의 개헌 공론화에 대비한다는 취지로 지난 10월 20일 김용환 수석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내각제 추진위를 발족했다. 자민련 내각제추진위 관계자들은 요즘 개헌 추진 가상 시나리오를 그려가고 있는데, 그 스케줄을 대충 요약하면 ▲98년 12월 자민련의 내각제 초안 작성 ▲99년 1~2월 국민회의·자민련 중심의 내각제추진위 구성및 내각제공론화 개시 ▲99년 3~4월 야당 동조세력 본격 영입 ▲99년 4~5월 양당 지도체제 정비 ▲99년 8월 개헌안 완성및 대통령 발의 ▲99년 9~10월 개헌안 국회 의결 ▲99년 9~12월 내각제 대국민 홍보 본격화 ▲99년 12월 개헌안 국민투표 등이다.

그러나 자민련의 뜻대로 개헌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않다. 현행 헌법 절차에 따르면 개헌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유권자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헌은 현 대통령의 임기와 직접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단이 선행돼야한다. 대통령, 국회, 일반 국민의 지지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져야 개헌의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내년 초부터 본격 거론, 정가선 상반된 예측

우선 대통령의 의중은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있다. 정가에서는 “대통령이 JP를 팽(烹)시키면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결국 약속을 지키게 될 것” “김 대통령은 본래 대통령제를 선호하므로 내각제 개헌을 하지 않을 것이다” 등의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있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구하려면 현재 한나라당에 속해있는 내각제론자들을 규합해야 한다. 또 요즘 국민들의 내각제 지지도는 30%에 미치지 못하고있다. 모든 조건이 유동적인 상태이다.

어쨌든 내년 초에는 개헌론이 도마위에 오르지않을 수 없다. 자민련은 일단 순수내각제 세일즈에 본격적으로 나서겠지만 이와함께 현행 5년단임 대통령제, 미국식의 대통령 4년중임제, 이원집정부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들도 크든 작든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회창 한나라당총재와 이수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이인제 전국민신당고문 등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어떤 입장을 택할지도 관심거리이다. 이회창 총재는 본래 대통령제를 선호했으나 최근 “내각제도 신중히 검토할 수 있다” 는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만일 자민련 내부에서 내각제 추진 시기를 놓고 이견이 나올 경우 내각제 추진은 상당한 장애물에 부딪치게 된다. 이와관련 현재 내각제 조기 공론화에 부정적인 박태준 총재, 박철언 부총재 등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도 주목된다. 이밖에 경제회생 여부, 남북관계의 변화 등도 개헌론의 변수가 될 수 있다.

또 개헌논의는 정계 지각변동도 맞물려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내년도 정계개편과 관련해서는 지금과 같은 공동여당및 야당의 3당체제 유지론, 개혁대연합 대 보수대연합으로 재편, 공동여당 합당에 따른 양당체제로 재편, 제4당 부상 가능성 등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입방아에 오르고있다. 결국 내각제 실현여부는 정계개편의 모양새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관련 개헌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김 대통령과 김 총리측이 대통령제도 아니고 순수내각제도 아닌 이원집정부제로 타협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개헌시기를 16대 총선 이전이 아니라 16대 총선직후 또는 김 대통령 임기말로 조정하는 방안도 거론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개헌을 할 경우에는 김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어느 정도 보장할 것인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단일화 합의 2주년을 맞을 때의 양측 표정은 어떻게 될까. 내년 이맘때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개헌론의 가닥이 잡혀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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