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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는 고향으로 간다. 변호사 생활 29년에 쌓은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선택했다. 중견변호사 조영황씨(59·사시10회). 남들은 서울로, 대처로 나오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판에 거꾸로 하행선에 오른 주인공. 그간 고생한 보답으로라도 눌러앉을만한 때, 왜 그는 난데없는 귀향을 택했을까?

“서울이 싫은 것도, 도피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을 이제서야 실행하는 것 뿐입니다. 제게 중요한건 돈도 명예도 아닌 제 인생입니다. 투쟁하고 싸우고 경계하고, 서로 벽을 쌓는 그런 삶을 떠나서 이젠 완전한 시골노인으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고향을 위해 작으나마 봉사도 하고, 어딜 떠나고 찾아간다기 보다는 그저 제 본자리를 되찾아간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요.”

중졸학력에 독학으로 사시합격, 줄곧 변호사로 활동

어떤 얘기든 절대 기본 톤을 넘어서는 법이 없는 차분한 말씨와 절제된 음성. 선비같은 첫인상과는 달리 그는 나이 60근처에 ‘큰 일’을 내고 말았다. 그의 이력에 또하나 추가된 특기사항. 중졸의 학력에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 처음부터 판·검사를 전혀 거치지 않고 줄곧 변호사로만 활동해온 경력외에도 이제 변호사로선 드물게 자의로 전직을 한 케이스가 됐다.

하루 아침에 결정한 일은 아니다. 20여년 마음에 품어오던 것을 작년 연말 재차 숙고하고, 올들어 구체화한 것 뿐이다. 대법원에 이미 고향인 전남 고흥의 시군판사를 신청한 상태, 지난 4월부터 주변정리를 시작했다. 자신이 맡고 있던 소송이며 관여하던 시민단체활동을 하나둘씩 접고, 현재는 올 가을에 있을 대법원의 발령통보만 기다리고 있다. 지역 시군판사는 작년에 신설된 제도로, 주로 2,000만원 이하 소액사건이나 즉결, 이혼확인, 지급명령 등 비교적 가벼운 재판을 다루게 된다. 이름은 판사지만 승진도 없고, 이동도 없을뿐더러 정년은 63세로 못박힌 사실상 봉사직.

29년동안 이어온 일이다보니 떠날 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개인 변호사업무외에도 그는 세간에 알려진 시민운동파. 8년동안 활동해온 성폭력상담소 이사직은 얼마전에 관뒀고, 국내 기업의 97%나 차지할만큼 수많은 영세기업들이 포진한 전국소기업연합회의 종합법률상담자문단장직도 이번에 정리했다. 그리고도 아직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피해법률지원본부장, 20여년째 몸담아온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사장으로 묶여있는 처지. 그 역시 오래지않아 비워줄 자리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나 떨어진 고흥엔 이미 살 집도 말끔히 손봐 두었다. 얼마전 낡은 옛집을 헐고 새로 지으면서 안채외에 조그만 사랑채까지 따로 마련. 가까운 사람들중엔 벌써부터 ‘놀러가겠다’며 바리바리 ‘예약’부터 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 ‘처음엔 고향에 내려간 뒤 그동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는데 워낙 온다는 분들이 많아 다시 옛날처럼 아는 사람들을 반겨맞으며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돌아가야되나 어쩌나 생각중’이라는 그는 그래도 고향생각만 하면 마음부터 설렌다. 오래도록 고향에 홀로 계시게 했던 팔순 노모도 직접 모시고, 틈나면 고구마나 마늘, 양파 등이 총총히 심어진 텃밭에도 나설 생각으로 벌써 마음이 ‘콩밭’에 가있다.

돈 보다는 명예와 자존심 지킨 ‘시민운동파’

어찌보면 올해는 그의 인생에 있어 중간결산기 같은건지 모른다. 남다른 기록도 많다. 중졸의 학력으로 사시에 도전, 학력의 벽도 뛰어넘었다.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는 꽤 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흥군내 초등학교중 전체 2등을 한 기억도 있다. 더 좋은 학교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학비를 면제해주겠다는 고향 중학교도 마다하고 부산까지 나갔다가 갖가지 고생을 하며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했다. 정규학교라곤 그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29세가 될 때까지 힘겹게 살았다.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신문배달도 했고, 물건을 팔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준비, 29세에 들던 해, 아이 둘의 아버지이자 가장이 돼 있던 그는 마침내 합격소식을 들었다. 당시 합격자수는 총 34명. 자신이 살던 포두면 일대에선 자신이 첫 사시합격자였고, 발표가 나자마자 동네의 어르신들까지 갓에다 도포까지 갖춰입은 채 인사를 올 정도로, 고향에선 대단한 경사였다.

판사가 될 순 없었다. 당장 생활문제가 절박했던 이유도 있고, 도무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일이 월권처럼 느껴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변호사로 출발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르려고 애썼다. 남이 어떻게 보든 너무 돈에 연연해하지 말 것. 대신 돈보다는 명예나 자존심을 지킬 것. 실제로 그는 평생 사건 브로커 없이 일 해온 변호사들 중 한 사람이었고, 정치권 한번 기웃거려본 적이 없다. 대신 부산하게 드나든 곳이라곤 오히려 자기 돈만 푼푼이 드는 시민단체들.

현재까지 20여년 몸 담아온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선 한때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거액의 사비까지 털어놓고도 오히려 집회 과민반응을 앓던 유신정권 때문에 애꿎은 아이들이 경찰에 조사를 받고 다니는 해프닝도 겪었다. 89년에 있었던 백화점 사기세일 소송은 그의 대표작이자 성공작중 하나. 후배 변호사들과 함께 사기세일 백화점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 승소함으로써 소비자운동의 기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그후에도 언론피해, 영세기업, 여성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몸사리지 않고 일해왔다. 덕분에 바쁜 시간이 더 바빠져야했지만, 얻는 것도 적지않았다.

특별검사 1호로 부천서 성고문사건 맡아

“변호사로서 시민운동을 한다는건 여러모로 잇점이 되기도 합니다. 법조계 안에만 있다보면 자칫 편협해질지도 모를 시각을 좀더 현실적이고 균형있게 잡아주고, 행여 나태와 부패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 스스로 바로 잡게 만들어주죠. 초심을 지키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겁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도 아주 뜻있는 일입니다.”

또하나,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88년 최대의 뜨거운 감자였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 검찰이 공무원 독직범죄인 이 사건을 기소하지 않자 법원은 이에 대한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결국 그에게 일을 맡긴 것. 변호사협회가 추천한 ‘특별검사 제1호’를 기록하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더 알려졌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문귀동 피고인측에도 변호사를 참여시켜 공정한 진술기회를 주었고, 그리고도 결국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아직도 당시 사건으로 그를 기억하거나 후일담을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않지만, ‘아무리 죄가 미운 사람이라도 정직하게 주어진 벌을 모두 받고 나온사람을 다시 거론하는 건 그 사람에게 또다른 피해를 주는 일’이라서 절대 함구.

물론, 그도 백전백승의 전사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장애도 적지 않았다. 95년 그가 국선변호인을 맡았던 한 택시기사의 성폭행, 살인사건인 온보현사건도 결국 사형집행으로 마감됐다. 처음부터 중형은 예견돼있었지만 사형만은 막고 싶었다. 처벌과 교화가 목적이라면 장기형이 더 적합하다고 온갖 자료를 들이밀며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아직 사람들 사이엔 죄나 처벌에 대한 인간적 고려보다 감정적인 반응이 먼저라는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인생경험토대로 변론, 그의 ‘가슴’이 교과서

변론 스타일도 독특하다. 그것도 그의 성격 그대로 닮았다. 신참시절엔 미사여구도 쓰고, 책도 인용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가며 변론을 했지만 이젠 그의 ‘가슴’이 교과서다. 수십년 자신이 살아오면서 체득한 경험에서 그는 힌트를 얻는다. 변호사가 아니라 숫제 인생상담가 같기도 하다. 얼마전 툭하면 말썽을 부려 소년원 신세를 지던 한 남학생의 세번째 변론을 맡았을 때도 그랬다. ‘말썽을 안부리고 자라는 것도 성장기의 한 과정이지만, 자라면서 간혹 크고 작은 말썽을 부리며 커가는 것도 더 큰 착오없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한 배움의 과정’이라는 논지를 폈다. 또 자신이 진 빚 때문에 부모가 고민을 하자 이를 구하기위해 강도를 하다가 살인으로 번진 이른바 ‘창천동 사건’때는 피고인 본인부터 변호사 대면을 거부한 일도 있다. 살 가망이 없는데 뭐하러 변호사가 필요하냐는 것. 그때도 조용히 다독거렸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다. 네가 죽고 사는 얘길 하러 온게 아니라 정말 네 인생이 모두 나쁜 것이었나, 지금이라도 한번 네 인생의 결산을 해보자는거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조변호사에게도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나이 60에 들기 전 새로운 길도 찾았고, 또 그 미래에 대해 여유와 자신감도 갖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건 바로 자기 자신이예요. 자기가 자기를 못믿는거죠.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또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내 마음을 나조차도 믿지 못하고 불안한겁니다. 어디서 큰 소리를 쳐놓고도 막상 지나고나선 그걸 지킬 자신이 없어서 후회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더 내 자신을 닦는데, 내 행동을 바로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60쯤 되고보니 이제야 좀 자제가 됩니다. 이젠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그저 어려움 그뿐인줄 알았는데, 지금와서 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돈 잘버는 변호사 보다는 평범한 촌로로…

버리면 버릴수록 얻는 게 더 많다는걸까? 평생 변호사로 살 줄 알았던 아버지가 낙향하기로 결정한 뒤, 가족들은 더 끈끈하고 단단하게 뭉쳐졌다. 일년내내 바깥일에 분주한, 돈 잘 버는 변호사 대신 가족끼리 서로 기대며 살아가야 할 평범한 촌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만장일치의 응원군을 믿고 오늘도 조변호사는 고향 꿈을 꾼다. 지난 추석날 저녁 마을노래자랑대회에서 멋지게 부르던 홍콩아가씨도 올해 다시 연습을 해야할 지 모른다. 혹은 내년 여름만 하더라도 정말 모시옷을 입고 정자나무 아래 앉아, 낮엔 구름을 밤엔 별구경을, 그리고 장날엔 장터에도 어슬렁 나타나는 완벽한 시골노인이 돼 볼 수 있을 것이다. 새 꿈이 살아있는 99년 7월은 그래서 그에게 더 아쉽고 짧기도 하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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