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한의 세월 살아온 '할머니의 절규'

“그것이 무슨 인과인지 나는 고엽(枯葉)같은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외롭고 괴롭고 죽고 싶을 때에 적은 한구절이 ‘한(恨)’이라는 이름이 적당할 것 같아 이 비참(悲慘)했던 인생행로의 구절을 ‘恨’이라고 불러볼까 한다.”

평생 남편의 외도와 폭행을 참아왔던 70대 할머니의 비망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할머니는 55년의 결혼생활을 마감하기 위해 이혼소송을 내면서 재판부에 대학노트 한권 분량의 비망록을 제출했다. 결국 할머니는 법원으로부터 이혼판결을 받아냈고 24억여원 상당의 재산분할과 2억원의 위자료를 받게됐다. 본지가 입수한 할머니의 비망록은 한많은 우리네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가부장적 전통이 지배했던 20세기 우리 사회의 굴절상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사연을 비망록과 소장 등을 통해 재구성해보았다.

A(73·여)씨가 남편 B(75)씨와 결혼한 것은 44년. A씨는 당시 지주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온 뒤 평양임시사범학교를 졸업, 정교사 자격증을 소지했던 신여성이었다. 여고동창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게 됐고 두사람은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방을 차렸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불보따리에 옷가지만 갖고 맨몸으로 38선을 넘었다. 남편은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박봉으로 겨울엔 냉방에서 자야했다. 이 와중에 A씨는 미제물품 행상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편의 월급은 모두 저축했다. 남편이 60년 대령으로 예편하자 A씨는 보세의류 장사까지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A씨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한옥 3채를 더 마련했다.

그러나 남편은 타고난 바람둥이였고 피땀흘려 쌓아놓은 재산마저 탕진하기 시작했다. 퇴직금은 모두 찻집을 운영하던 이모(여)씨에게 주었는가하면 수송동 한옥 3채는 사귀던 여자의 소개로 그린벨트내의 토지와 바꿨으나 알고보니 이땅은 거의 가치가 없는 임야였다.

사실 남편은 결혼직후부터 A씨와는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을 비망록은 보여주고 있다.

“부부란 무엇인가. 일본의 어떤 지역에서 조사한 결과 부부가 하루에 50분 정도 대화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집은 욕설외에는 대화가 없다.”

특히 남편은 성격이 포악해 말문이 막히면 욕설과 함게 구타를 시작했고 A씨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귀가 쑤셔 밤잠을 설친다. 나의 인생이 험하다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긴긴 세월 부정한 생활과 난폭한 매질에 나는 사지가 멍들었다. 세상 남자가 다 이렇다면 참고 살아봐야겠지. 찬바람이 불면 귀가 쑤신다.”

한쪽귀는 고막이 터져 보청기를 하고 살아야만 했다.

“보청기, 뇌를 두드리는 기계. 내 인생의 한부분이 된 조그만 존재. 신의 저주인가 고통을 참으며 나는 너와 공존해야 하나. 파리한 얼굴이 무던히도 견디어간다. 내 생명 다하도록 나는 이 조그만 기계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오늘 또 내일…”

한번은 수도자수학원을 다니다가 팔을 삔 일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A씨는 비망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자식들과 살아야하므로 자수미싱을 배운다. 종각을 돌아 버스를 타다 나는 힘없이 오른 손목을 골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50일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센다. 조그마한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별뿐. 그때 남편이 집에 들어서면서 한 말, 나는 주님께 빌며 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 돈잡아 먹었구나.’ 이것이 골절한 아내에게 남편이 하는 말일까.”(76년5월20일)

그러나 A씨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남편의 외도였다.

“그의 마음, 끈을 풀고 달아난 마음, 사라진 지 오래다. 지순했다고 생각했던 소녀시절의 추억이 초록빛 바람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가버린 마음 찾을길 없어 홀로 들판에 지는 황혼만 차지하고 나는 홀로 서 있다.”

남편은 A씨가 첫딸과 함께 겨울에 냉방에서 자고 있는데도 외도를 했고 다방주인이던 이씨와는 아이까지 낳았다. 이때부터 남편은 비망록에 ‘F’로 표현된다.

“1979년 1월18일 낙방.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나는 쓰러진다. 눈물마저 마른날. 그러나 F는 새옷을 맞춰입고 거울앞에 섰다. 나는 눈을 의심한다. 놀란 가슴을 움켜잡는다. 자식은 낙방해 울부짖는데 새옷은 언제 맞춰 입었는지, 거울앞에서 그 음란한 포즈를 취하고 섰다. 나는 저 거울을 산산조각을 낼까, 자살을 할까. 자살의 자유도 없는 죄많은 인생이던가.”

자정이 되도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한많은 여인의 심정도 읽을 수 있다.

“외박 밤 12시5분, 10분, 30분…. 항상 있는 일인데 재깍거리는 시계소리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나의 얇은 신경은 하나하나 분해된다. 적막하고…울분과…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시작되고 이것으로 끝나리. 아무런 창조도 없는 무기력과 불안을 걷잡을 수 없어 나는 상해간다. 왜… 자기만 더러운 쾌락을 위하여 남을 괴롭혀도 된다는 말인가. 시간이 갈수록 가속적으로 나의 정신은 광열의 상태로 곤두박질친다. 지난날이 주마등같이 눈앞을 맴돈다. 나는 왜 상처투성이의 그 배에 올라탔나. 증오와 절망의 난파선에 나는 왜…”

그러나 남편은 나이가 들어도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90년 신정연휴기간중엔 유부녀와 모텔에 들어갔다 경찰서에 끌려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A씨의 비망록은 자신에 대한 연민과 걱정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끼칠 악영향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점철돼있다.

“자정에 들어온 F. 이중생활에 젖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속에서, 매일같이 욕설과 거짓의 생활속에서 자식들의 인격은 어떻게 될까. 메마른 땅에 잡초처럼 고사해가는 풀모양 이 자식들은 어이되나. 앞날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나. 어떻게 이 열매가 완숙되지 않고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까”(76년 12월8일)

폭력과 외도로 견딜 수 없는 삶을 A씨는 자식들과 종교에 의지했다. 심지어 남편의 구원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자기를 반문해본다. 자식때문에, 자식이 무엇이기에, 자식은 왜 나만의 자식인가? 아내도 자식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 왜…? 왜…?”

“그는 눈 뜨고 있는 한 파괴시킨다. 주워담을 행복도 없다. 인간상실자. 절망의 인력(引力)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종교? 인내? 단념? 주검? 주여 그의 존재에서 정신적 도피나마 갈 길을 열어주소서.”

“폭력. 오직 자식만을 위해 사는 인생 거둬야할 열매 여섯을 위해 모진매를 참은날 몇십년”(76년 12월30일)

A씨는 자살도 여러차례 생각했다. 그러나 자식들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자살이 그다지 힘든 것일까. 나 하나 간다는 것은 힘들 것 없지. 그러나 내 치맛폭이 매달린 여섯 자식. 이것을 뿌리칠 수 있는 자만이 자살할 능력을 가진 자. 나는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있는 용기조차 없는 미물(微物)이다.”

이렇게 숙명과 인내로 55년을 버텨왔던 A씨가 이혼을 결심한 것은 남편이 배다른 아이를 몰래 호적에 올리고 장남을 형사고소했기 때문. 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대신해 장남에게 사업을 맡기자 남편이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며 장남을 경찰과 검찰에 고소한 것이다. 일찍이 남편보다 장남에게 의지해온 A씨는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평생 일군 전재산을 남편이 배다른 아이에게 넘겨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부동산 투자에 나선 A씨 부부의 재산은 현재 수십억원대의 이른다. 물론 A씨의 힘으로 이룬 재산이나 명의는 남편앞으로 돼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론 당연한 것이었다. A씨는 한번도 남편재산 따로, 자기재산 따로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다.

A씨는 소송을 내면서 비망록과 함께 재판부에 소송에 이른 심경을 밝혔다.

“73세의 나이에 이런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너무도 기가 막히고, 한없이 부끄럽기도 하고, 지나간 세월에 대한 수많은 회환이 머리속을 오가면서 저를 괴롭히기도 하나, 너무도 힘들었던 세월에 대해 한단락을 짓고 눈을 감고자 이렇게 부끄러운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재판장 이재환부장판사)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남편은 A씨에게 위자료 2억원과 A씨가 재산형성에 기여한 정도를 고려, 순자산액 73억여원 가운데 24억여원의 부동산을 넘겨라”고 판결했다.

A씨의 소송대리를 맡았었던 문상호(文相浩)변호사는 “처음에는 두분의 해로와 소취하를 적극 설득했으나 A씨를 만나보고 비망록을 읽어본 뒤 남은 인생이라도 편안하게 사시도록 돕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도 인내와 희생으로 6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고 유학까지 시킨 A씨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박일근·사회부 기자 ikpark@hk.co.kr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20년 05월 제2829호
  • 이전 보기 배경
    • 2020년 05월 제2829호
    • 2020년 05월 제2828호
    • 2020년 05월 제2827호
    • 2020년 05월 제2826호
    • 2020년 04월 제2825호
    • 2020년 04월 제2824호
    • 2020년 04월 제2823호
    • 2020년 04월 제2822호
    • 2020년 03월 제2821호
    • 2020년 03월 제2820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이탈리아 피렌체 이탈리아 피렌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