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황제를 키운다] 부모 욕심이 아이를 망친다

08/10(화) 14:43

“방학인데요, 별로 놀지도 못했어요. 엄마가요, 방학은 본래 학교다닐 때 못하는 거 공부하는 시간이랬어요.”

서울 강남구 Y초등학교 3학년 L양(9). 여름방학이라지만 동해안을 한번 갔다온 것을 제외하면 L양의 하루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학교수업이 없는 대신 학원에서, 그리고 가정교사와 보내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유치원 때부터 배워 온 피아노에다 지난해 부터 시작한 바이올린, 영어회화, 컴퓨터 교습 등. L양의 일주일 시간표를 채우고 있는 과외 과목들이다. 여기다 일주일에 세번 나가는 수영강습을 보태면 시간표에는 빈틈을 찾아 보기 어렵다.

L양의 아버지는 모 중견기업 사장. 중학교 2학년인 아들 밑에 터울을 두고 딸을 둔 터라 정이 각별하다. 그래서인지 L양의 부모는 학급의 다른 아이들이 더러 방학중에 가는 해외 어학연수를 못보내 주었다며 오히려 딸에게 미안해 하는 눈치다.

‘수준 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려

L양 어머니의 이야기.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타고난 소질도 있어요. 그 특기를 어릴 때 찾아서 가꾸어 주지 못하면 묻히고 말죠. 아이가 힘들어 하긴 하지만 이것저것 (과외를)해보다 보면 뭔가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L양의 어머니는 지휘자 정명훈씨와 여자 골퍼 박세리에게서 자신의 ‘딸 키우기 방법’의 정당성을 구하는 눈치다. “정명훈씨와 박세리가 세계적인 인물이 된 것은 다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아이들의 잠재적 소질을 개발하고 키워준 덕분이잖아요.”

L양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공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자는 안목이 높아야 시집을 잘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덕분에 L양의 옷과 신발, 학용품은 모두 고급 백화점에서 산 것들이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고급제품을 써봐야 안목과 수준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생일에도 L양은 학급친구들을 초대해 아버지 엄마의 생일잔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화판 생일잔치를 연다. 초대받는 친구들은 대부분 어머니가 지정해 준 아이들이다. 친구들이 들고 오는 생일선물의 수준은 생일파티의 규모와 초대받은 아이들 어머니의 수준에 정비례한다는 것은 학부모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

L양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깊숙이 배있다. ‘수준’‘고급’이란 상투어는 물론이고 유명 브랜드 이름이 대화중에 불쑥 불쑥 튀어 나온다. L양에게 친구들은 정해져 있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아이들 이외에는 어울리지도 잘 어울려지지도 않는다. L양의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사신다. 어쩌다 명절날 시골을 가면 흡사 외국을 나간 것처럼 거리감을 느낀다. 시골에서 살고 있는 또래 사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L양은 그래서 “너무 재미없어요. 시골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부모들이 민드는 공주병·왕자병

L양은 ‘공주’다. 적어도 가정이라는 왕국안에서는 그렇다. 공주 중에서도 부모의 욕심과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제조되고 박제화해가고 있는 공주다. 공주·왕자 만들기는 초등학교 이전부터 시작된다. 외동아들, 외동딸의 경우에는 좀더 두드러진다. L양과 대화를 나누면서 가장 강하게 받은 느낌은 ‘엄마 아빠 뿐 아니라 세상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그의 사고방식이다. L양의 경우는 ‘공주 만들기’의 한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한국사회의 일각, 특히 부유층을 중심으로 만연하고 있는 풍조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일반성을 지니고 있다.

L양과 같은 아이들은 가정에서만 공주가 되는 게 아니다. 유치원과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남지역 한 유치원 K교사의 경험담. “집안에서 지나치게 떠받들어 키운 아이와 여타 아이들사이에 싸움이 많이 난다. 이런 아이들은 (유치원의)단체생활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고, 공동생활의 나눠쓰기도 이해하지 못한다. 유치원에는 다양한 장난감이 있지만 대체로 한종류의 장난감을 여러벌 갖춰 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엄마가 장난감을 사들고 와서 ‘우리 아이가 갖고 놀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왕자병·공주병은 핵가족 시대와 경제적 부의 증가에 따른 부산물일 수도 있다. 그런만큼 이같은 현상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도 10여년간 지속돼 온 ‘한 가정 한 자녀 갖기’정책과 경제발전이 맞물리면서 ‘소황제(小皇帝) 현상’이 나타나 심각한 교육문제가 됐다. 소황제는 응석받이로 키워 버릇없는 아이를 가르킨다. 아이 받들기가 옛날 황제 모시기나 다름없다는 비유다. 부유층 가정에서나 볼 수 있었던 중국의 소황제 현상은 전시효과를 타고 중산 층 가정까지 일반화하고 있다.

획일적 사고, 창의성 부족 현상

한국판 소황제 현상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핵가족 세대의 아이들이 진학한 중·고교에서도 가정환경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는 현상은 이미 일반적이다.

부모들의 가치와 기호에 따라 제조된 소황제들이 성장했을 때 과연 부모가 기대한 인물이 될 지도 지극히 의문이다. 이화여대 이기숙 교수(유아교육학과·이화여대 부속유치원 원장)는 “소황제로 키운 아이들이 나중에 빌 게이츠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 교수의 설명. “유치원 원생들에게 야외활동을 나가자고 하면 멍하니 서있는 아이들이 많다. 운동화와 옷을 스스로 챙겨 입을 생각을 않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대체로 사고가 획일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행동만 하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과도한 과외를 시키는 것도 부작용이 더 크다고 한다. 부담이 너무 커 흥미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가 산만해 집중을 못하고 무엇을 시키면 귀찮아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소황제 키우기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빈부차이를 떠나 전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며 무리를 해서도 재능교육이나 특기교육을 시킨다는 이야기다. 일부 가정의 소황제 키우기는 결과적으로 ‘아이 망쳐놓기’를 지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낳고 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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