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부패와의 전쟁] 서슬퍼런 칼, 뽑긴 뽑았는데...

08/24(화) 17:32

정부와 여당의 이번 부패방지종합대책의 주 타깃은 공직자들이다.

막강한 권한과 일반 사기업 못지않은 대우를 받는 고위직 공무원에서 최저생계도 쪼들리는 하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전 공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처벌도 형식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구체적이면서도 단호하다. 검은 돈의 의혹이 짙은 자금의 금융계좌 입출금 내역을 조사할 수 있는 ‘자금세탁방지법’을 제정하고 보수외 1,000만원이 넘는 수입 증감분에 대해 내역을 신고토록 공직자 재산등록을 강화한다. 또 3년간 근무했던 부서의 관련 기업·단체에 재취업을 제한하고 부패 공직자는 15년간 관련기업이나 단체에 재취업할 수 없도록 한다. 오랜만에 서슬 퍼런 칼을 빼든 것이다.

하위직공무원 생계문제가 먼저

그러나 이런 엄한 처벌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하위직 공무원들의 최저 생계 보장 문제다. 아무리 가혹한 법으로 부정을 막으려해도 기본 생계가 흔들린다면 크고 작은 비리유혹에 흔들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흘 굶고 담 안넘어가는 사람 없다’는 속담이 있듯 ‘기본’은 보장해 준 뒤 처벌 하는게 순리다. 정부는 ‘5년내에 민간기업 수준으로 공무원 보수를 현실화하겠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역대정권들이 수차례 공언했지만 한 차례도 실현되지 않았고 지난해 IMF위기극복에 앞장선다는 명분하에 공무원임금은 또다시 대폭 삭감됐기 때문이다.‘적절한 대우, 그런 뒤 단호한 처벌’이라는 순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서울 강서구 모 동사무소 직원인 K(35)씨의 예는 하급 공무원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년제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K씨는 96년 9월 ‘안정된 직장’이라는 매력에 끌려 뒤늦게 공채를 통해 공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동사무소에서 3년째 근무하는 9급 행정직이다. 2년전 공직 생활을 하는 아내와 결혼, 현재 15개월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그토록 열심이던 동창회모임도 발길을 끊었다. 모임에서 급여 문제로 생긴 작은 소동이 발단이었다. 당시 IMF 한파로 실직 위기에 처해있던 한 친구와 급여 이야기를 하다 본봉이 48만원이라고 하자 그 친구가 ‘거짓말 하지마라’며 맞받아 치는 바람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현재 K씨의 월급여는 본봉 48만원에 각종 수당 25만원을 포함해 73만원 수준. 기여금, 의료보험 등 기타 공제금 8만원을 제하면 손에 쥐는 것은 65만원 정도다. 여기에 분기별로 본봉의 100%(48만원)인 보너스가 나오는 달에는 113만원으로 늘어난다. 97년까지만해도 체력단련비 명목으로 본봉의 연간 200%가 추가 지급됐으나 지난해부터 이것도 없어져 생계가 더 어려워졌다. 현재 3,200만원짜리 전세에 살고 있는 K씨에게 내집 마련 계획을 묻자 “생각할 여유도 없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이것이 하급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고위직 부정에 대한 처벌 강화해야

최근 기획예산처가 소속 공무원을 대상으로 분석한 ‘직급별 행정경비’에 따르면 장관급의 한달 행정경비는 보수 578만8,000원, 특정업무비 148만5,000원, 차량 유지비 128만5,000원, 사무실 유지비 111만5,000원 등 총 1,862만원으로 집계됐다. 시간당으로 치면 9만7,000원으로 대기업 임원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러나 말단인 9급 공무원의 경우는 장관의 10분의 1도 안되는 7,000원에 불과했다. 업무 성격상 차이를 인정한다 치더라도 공무원내에서도 ‘빈부격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던 부패 공직자수가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는 것도 정부 여당이 강력한 부패방지대책 마련을 서둔 이유중의 하나다. 사정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91년 933명에 불과하던 부패 공직자수는 95년 부천·인천의 지방세과 하위직 공무원들의 도세 사건을 계기로 급증하기 시작, 지난해에만 무려 3,722명으로 4배 가량 늘어났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임창열 경기도지사 부부 뇌물사건, 고급 옷 로비의혹사건 등 모범을 보여야 할 고위 공직자들의 스캔들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번 부패방지대책이 하위직 공무원의 원천적인 부정 방지도 중요하지만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을 저지르는 고위직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쪽으로 조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칙은 일벌백계,내용은 흐지부지

현행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조항에 따르면 ‘직위를 이용해 3,000만원 이상 5,000만원 미만의 뇌물을 받은 사람은 5년에서 7년, 5,000만원 이상의 수뢰자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정 형량만 보면 일반 형사범에 비해 상당히 엄격하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뇌물죄의 구속률과 기소율도 각각 24.2%, 70.7%(96년 기준)로 전체 형사범 평균 8.5%, 26.7%에 비해 거의 3배에 이른다. 얼핏보면 우리나라가 뇌물 범죄에 관한한 일벌백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딴판이다. 구속이나 기소율은 높으나 처벌의 마지막 단계인 양형(量刑)에 와서는 흐지부지 된다는 사실이다. 91~93년 서울지검 본청에서 뇌물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의 1심 선고를 보면 실형율 25.6%, 집행유예율 66.4%, 선고유예율 5.6%이다. 항소심으로 올라가면 실형 비율은 9.3%로 떨어진다. 이는 절도, 상해죄, 사기죄 등의 실형율이 각각 34.7%, 36.1%, 44.5%인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연세대 박상기교수(형사정책)는 “현재 정부가 검토중인 자금세탁방지법, 내부비리 고발자에 대한 보호·보상 등은 검은 돈의 흐름을 추적하고 돈 세탁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법적 장치로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또 “현재의 뇌물죄에 대한 법정 형량도 낮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해 그 효과가 반감됐다”며 “김현철씨 사면에서 드러났듯 부패척결의 성과는 법 제정 자체가 아닌, 실천 의지에 달려있다”고 지적했다.

부패의 역사는 깊다. 이 뿌리 깊은 부패 구조를 혁파하기 위해선 집권층의 솔선 수범은 물론 뼈를 깎는 실천 노력이 수반되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충고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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