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이대로 좋은가] 권력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법'

08/05(목) 10:56

법조인들은 ‘대한민국 법이 제대로 적용됐다면 현 정치인의 절반, 그리고 상당수 대기업 총수들은 아직 교도소안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1948년 근대법이 도입된 이후 우리의 법은 정의와 평등을 표방해 왔지만 언제나 약자보다는 가진자와 권력자들의 편에 더 가까이 서 있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특히 직위를 이용해 거액의 ‘검은 돈’을 챙긴 초대형 비리 사범들은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반면 코묻은 돈에 목숨을 건 중하위직 공무원이나 서민들은 감방에서 형기를 마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95년 한보사건에 연루돼 2억5,000만원의 금품을 수뢰한 혐의로 97년 구속 수감된 전 야당 국회의원 출신 A씨. 같은 한보사건에서 2억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당시 여당 출신 광역시장 B씨.

직위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거액의 뇌물을 받은 이들은 ‘5,000만원 이상의 뇌물을 받은 사람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조항에 따라 최소 2007년까지는 감방에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직도 감옥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죄값을 치르고 있을까. 현실은 법규정과는 다르다. 당시 여야 수뇌부의 측근이었던 이 둘은 일반인이라면 ‘있을 수도 없을 정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았다. A전의원은 작량감형이 되면서 대법원에서는 징역 5년에 추징금 2억5,000만원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정치인사이에서도 권력 관계의 변화와 정치력 영향력에 따라 사법부의 잣대도 오락가락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A전의원은 이후 소속 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졸지에 여당으로 격상(?)돼면서 이듬해인 98년 8월15일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특별 사면 대상에 포함, 자유의 몸이 됐다.

A의원은 징역 5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 교도소에서 보낸 기간은 채 6개월이 안됐다. A의원은 97년 2월13일 긴급체포돼 그해 12월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고 98년 8월15일 특별사면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1년6개월여를 감방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구속 수감된지 얼마 안돼 구속집행정지를, 이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뒤에는 곧바로 법원에 형 집행정지를 신청, 대부분의 기간을 감방이 아닌 집과 병원에서 보냈다. A의원은 8·15 특별사면 후 일본 외유를 떠났다가 올 3월초 귀국해 당무에 복귀, 현재 화려한 정계 재입문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반면 비슷한 시기인 97년 9월 서울지법 형사합의 22부는 고급주택인 빌라트 건축허가를 얻기 위해 구청 공무원에게 1,000만원의 뇌물을 주는 등 조합비를 불법 전용한 주택조합장 C씨는 징역 3년에 법정구속됐다.

이것은 ‘과연 법이 만인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가’하는 질문에 고개가 흔들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고도 법절차를 교묘히 이용해 교도소를 빠져나와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권력형 부정부패 관련자들은 헤아릴 수없을 정도다.

흔히 고위 정·관계자 비리사범들의 정계복귀 수순은 ‘구속과 동시에 구속정지신청을 신청해 최종 판결때까지 병원서 요양→법원의 최종 판결뒤에는 형집행정지를 신청해 집이나 병원서 요양→사면·복권으로 자유의 몸→장기간의 외유로 민심 수습→정계 재입문’이라는 정해진 사이클을 밟고 있다.

굵직한 권력형 비리 수사를 담당하는 대검 중수부의 단골 손님중 한사람으로 이원조 전의원. 이씨는 89년 5공 비리사건으로 중수부에 소환됐으나 불구속 처리된 것을 시작으로 93년 동화은행자금사건 때도 안영모 은행장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았으나 일본으로 도피, 유야무야 넘어갔다. 이씨는 97년 노태우 비자금사건으로 2년6월형을 선고 받았으나 곧바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그해 12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96년 5월 장학노 당시 청와대 부속실장은 기업체로부터 6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으나 같은해 11월 “희귀병인 근이양증에 걸려 수감생활을 계속할 경우 생명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형집행정지결정을 받고 풀려나 지난해 3월 사면(잔형집행면제)된뒤 현재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재계선언을 계기로 민주산악회재건에 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롯머신업자인 정덕진·덕일 형제로부터 뇌물을 받아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박철언 전의원은 96년 특별사면및 복권돼 현재 자민련 부총재로 화려한 정치부활에 성공한 케이스. 박부총재는 최근 ‘2+α’식 정계 개편을 막후에서 설계해 김대중대통령의 정계 개편구상에 일역을 담당하는 등 국민의 정부들어서도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 박 부총재와 함께 슬롯머신사건에 얽혀 수감생활을 했던 엄삼탁 전 병무청장도 현재 국민회의 부총재직을 맡고 있다. 국민회의가 영남권 인사로 영입한 엄부총재는 한국씨름연맹총재직과 생활체육협의회장직을 맡는 등 체육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2·12 및 5·18 반란모의참여 혐의로 징역 3년6월을 선고받았다 사면된 장세동 전안기부장도 올초 송파갑 재선에 나오려다 막판에 출마를 포기하는 등 정계 진출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같은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정호용 전의원도 97년 12월 특별사면된 뒤 연고지인 대구 TK를 발판으로 세력을 다지는 등 정계 재입문을 저울질 하고 있다.

한보비리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에 추징금 1억원을 선고 받았던 정재철 전의원은 98년 8월15일 특별사면된 뒤 최근 한나라당 고문으로 취임, 현재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치고 있다.

96년 4월 관련업체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당시 공정거래위 정모국장도 지난해 3월 형선고실효와 복권이 돼 전과가 말소됐다.

정치인외에 정주영 현대명예회장과 박태준(현 자민련총재)전 포항제철, 이건희 삼성, 김우중 대우, 최원석 동아, 김승연 한화, 이준용 대림, 김준기 동부 등 재벌그룹 총수들도 뇌물 공여혐의로 징역과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으나 모두 사면·복권돼 전에 못지 않는 활동으로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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