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불안하다] 정치논리에 춤춘 물가정책

08/31(화) 14:44

“전통(全統) 때는 어쨋든 물가 하나는 확실히 잡았는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 지…”

한번쯤은 들어 봄직한 어색하지 않은 레퍼토리다. 노태우 정권 말기와 김영삼 정권 초반. 체증길 택시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운전기사들이 거의 어김없이 꺼내는 말이었다.

실제로 당시 물가 추이는 민생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단적인 예로 87년 12·16대선부터 88년 4·26총선까지 땅값은 27.5%, 소비자 물가는 7.1%나 올랐다. 오죽했으면 설악산 백담사에 나가 앉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경제강의’가 어필했을까.

전씨가 백담사 하산을 서두르던 90년 9월께. 하루 수백명씩 몰려드는 신도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전씨가 행한 연설의 단골 메뉴는 경제였다. “우리가 86년도에 단군 이래 처음으로 50억 달러 흑자를 냈습니다. 87년도에는 선거를 치른다고 법석을 떨면서도 100억 달러 흑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과소비다 뭐다 해서…”

전씨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과 인삿말은 더 희화적이었다고 한다. “5공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물가가 올라 큰 일입니다.”“각하께서 나라가 어지러운데 이곳에 그냥 계시면 우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경제 개방화 ·국제화되면서 개입줄어

80년대 말 땅값과 소비자 물가가 고개를 들면서 5공 정권의 물가정책에 대한 한가닥 향수가 피어 오를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냥 웃어 넘길 수 만은 없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물가와 정치의 함수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물가는 정치와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가는 민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바로메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강한 시기일수록 정권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물가조작을 강화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가정책은 반대로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 정도와 개입능력을 나타내는 지표 역할을 한다. 경제가 개방화, 국제화할수록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강도와 범위가 좁아진다는 것이다. 물가에 대한 정부의 개입 정도는 박정희 정권 시기와 90년대 신문제목을 비교해 보면 확연해 진다.

<인상된 각종요금 환원케, 위반하면 허가취소(67년 1월10일)> <값 올리면 등록취소(70년 9월5일)> <물가 8월3일선 동결방침(72년 8월5일)> <11개 품목 가격규제 해제(74년 10월2일)> <물가 자율체제로 전환, 시장기능에 맞기기로(78년 1월8일)> <남덕우 부총리, 물가 2년만 참아 주십시오(78년 6월8일)>. 박 정권 당시 한국일보의 신문제목들이다. 초반에 찬바람이 불던 정부의 물가통제 칼날이 7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둔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90년대 들어서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규제일변도 가격단속 시장 왜곡> <재정·통화긴축 강화…초과수요 진정을>. 92년 5월22일자 서울경제의 제목이다. 95년 2월20일자 매일경제 제목은 자못 선진적인 톤을 띤다. <선거와 경제…통화정책 중립이 ‘안정기조’ 관건>. 박 정권 시대와 달리 물가정책이 행정조치 등 강제적 수단보다는 통화정책과 같은 금융수단을 통해 이뤄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장이냐,안정이냐에 따라 달라

그러나 정부가 강압적 물가통제 수단을 어느만큼 보유하고 있었느냐가 물가안정과 정비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 상호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자 중 어느 것을 우선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재정경제부의 99년판 국민생활 편람에 따르면 광복 직후부터 60년까지 물가는 1,517배나 뛰었다. 광복과 6·25가 낀 이 기간의 물가는 정부의 통제밖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박 정권의 개발정책이 본격화한 60년대(60~69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8%를 기록했다. 하지만 물가는 더 뛰었다. 연평균 생산자물가가 12.6%, 소비자물가는 13.2%나 치솟았다. 비록 박 정권 당시 물가관리제도가 단계적으로 도입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정책의 초점은 절대빈곤 탈출을 위한 성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도 물가상승은 계속됐다. 연평균 7.7%의 경제성장률을 보인 반면 개발자금 조달을 위해 통화를 증발한데다, 1·2차 석유파동이 일면서 연평균 소비자물가는 16.2%를 기록했다. 70년대를 관통하는 정부의 물가정책은 가격에 대한 직접개입, 다시말해 강제적인 인상억제였다. 대표적인 조치가 73년 3월 제정된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물가안정법)’이었다. 이 법의 골자는 주요 생필품에 최고가격이 지정되고 위반할 경우에는 부당이득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80년대 인위적억제,90년대 들어 현실화

80년대는 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룩한 유례없는 시기였다. 연평균 9.6%의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생산자물가와 소비자물가는 각각 3.3%, 6.3% 상승에 그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큰소리 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저물가를 위해 정부가 각종 공공요금 인상을 억제하는 바람에 공공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재정압박이 초래된 면도 부인할 수 없다. 90년대 공공요금이 줄줄이 인상된 것은 80년대 인위적으로 억제됐던 물가가 현실화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90년대 초반은 각종 내외적 상황이 겹쳐 소비자물가가 상당한 폭으로 뛰어 91년 9.3%, 92년 6.3% 상승률을 보였다. 경기호황에 따른 초과수요 압력, 부동산 경기 과열, 개인 서비스요금 자율화, 걸프전에 따른 유가상승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게다가 4대선거(대선, 총선, 광역·기초단체장 선거)가 92년 한해에 동시 실시되면서 시중에 자금이 대거 풀려나가 물가상승을 부채질 했다.

93년을 고비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낮아 지면서 물가안정기조가 정착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재경부에 따르면 91~97년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8%. 93년 이후 물가정책의 큰 줄기는 정부개입의 축소였다. 규제완화를 통한 시장기능 활성화와 대외개방 확대, 민간주도 경제정책에 맞춰 당연히 물가에 대한 통제도 완화한 것이다. 94년 2월 ‘가격변동 사후 보고제’를 폐지해 공산품 가격결정을 완전 자율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문제는 물가정책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경제부처의 한 관리는 “선거 때마다 경제가 흔들렸다”고 말했다. 정권적 차원에서 죽기 살기로 싸움이 벌어지는 선거 시기에는 경제부처의 물가정책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어렵다는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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