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이대로 좋은가] 정치인 재판은 '피고 맘대로?'

08/05(목) 11:00

사법권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像). 여신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눈에는 천을 두르고 있다. 칼은 엄정한 법집행을, 저울은 죄에 합당한 양형을, 눈의 가리개는 공정한 법적용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즘 비리연루 정치인들에 대한 재판진행을 보노라면 법앞의 평등이란 대전제는 구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재판기일을 빼먹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해외여행까지 다녀오는 정치인들. 정의의 여신이 법을 만들 뿐 지키지는 않는 정치인들을 보지 않으려고 눈가리개를 했다는 자조(自嘲)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달 16일 현재 서울고법과 서울지법, 서울지법 동부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전·현직 국회의원은 모두 11명. 「공업용 미싱」발언으로 기소된 김홍신(한나라당)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뇌물과 금품수수 혐의를 받고 있다.

금액은 김윤환(한나라당)의원이 33억5,000만원으로 가장 많고 가중처벌대상인 1,000만원에 미달하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당적분포는 한나라당 소속이 7명, 국민회의가 3명, 자민련이 1명이다. 일반 형사사범이라면 구속사유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구속후 보석으로 풀려난 정대철(국민회의)의원을 포함, 모두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일반인들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건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정작 재판기일에 법정에서 이들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불출석횟수를 꼽아보면 15차례를 기록중인 김종배(국민회의)의원을 필두로 김홍신(8회), 이기택(한나라당·4회), 백남치(한나라당·〃), 김윤환(3회)의원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여·야간 정국대치가 지속되면서 한달이 멀다하고 열리는 임시국회 일정상 재판출석이 어렵다는 게 이유다. 현행법상 국회의원은 회기중에는 국회의 체포동의가 없는 한 법정에 강제구인되지 않는다.

피고인의 잦은 불출석으로 재판진행이 더뎌지면서 1심선고를 마친 정치인은 노승우(자민련), 김상현(국민회의)의원 등 2명에 불과하다. 내년 4월이면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는데 그전까지 몇명이나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을지 의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귀하신(?) 피고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재판부의 무력감은 커져만 간다. 백남치의원의 담당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 재판장인 이호원부장판사는 7월9일 열린 4차공판에도 백의원이 나오지 않자“기소된지 6개월이 다되어가도 재판부가 피고인 얼굴 한 번 못보니 사법제도의 가치에 의문이 든다”고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정치인들의 버티기가 계속되자 법원의 분위기도 점점 강경해지고 있다. 서울지법 형사단독부와 합의부판사들은 4월초 연석모임을 갖고 본격적으로 불출석 정치인들을 소환키로 의견을 모았다. 재판진행이 늦어져 특별기일까지 지정한 만큼 국회회기중임을 이유로 한 기일연장신청은 더이상 고려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정했다. 이에따라 법원의 소환에 두차례 불응한 정치인에게 구인장을 발부하고 그래도 법정에 나오지 않으면 구속영장까지 발부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법원의 경고메시지는 바로 현실화했다. 4월8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김대휘 부장판사)는 김윤환, 김홍신의원과 이기택전의원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이어 22부는 같은달 22일 두번째 재판에 불출석한 백남치의원에게 구인장을 발부했다. 23부는 30일 이기택전의원이 낸 재판연기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날 구인장을 발부했으며 같은달 14일에는 30부(재판장 이근웅 부장판사)에 배당된 조익현(한나라당)의원에게도 구인장이 보내졌다.

시민단체와 여론의 움직임도 법원의 결정과 궤(軌)를 같이했다. 참여연대는 4월8일 국회를 방문, 재판출석을 거부하고 있는 여·야의원 7명에게 재판출석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참여연대는 서한에서 “정치인들의 혐의사실이 무거운데도 대부분 불구속 기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소후에도 재판을 거부하는 등 법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비리정치인이 뿌리내릴 수 없을 때까지 시민감시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언론도 재판기일마다 정치인의 출석여부를 기사화, 법의 심판대로 나설 것을 재촉했다.

법원과 여론의 단호한 의지에 한계를 느낀 것일까. 하나둘 정치인들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6월4일에는 김홍신의원이, 7월18일에는 이기택전의원이, 이달 15일에는 김윤환의원이 출석했다. 백남치의원도 7월30일 열린 5차 공판에는 출석해 “국회일정때문에 못나왔지만 앞으로 열심히 재판하겠다”고 뒤늦게 재판부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자신들이 받은 돈은 어디까지나 정치자금이었으며 대가성이 없기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어떤 정치인도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기소된 것 자체가 표적사정의 희생양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위해선지 재판부에 무언의 항의를 전하기위해선지는 몰라도 지역구주민들과 동료국회의원들을 대동하는 사례가 잦아진 것도 공통점이다. 이기택전의원이 출석하던 지난달 18일, 지지자 100여명은 서울 서초동 법원앞에서 이전의원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나흘뒤 김상현의원의 항소심에는 국민회의 소속 중진의원 10여명과 유권자들이 법정을 가득 메우는 바람에 법정 출입문을 열어둔 채 공판이 진행됐다. 김윤환의원도 동료의원들과 함께 법원에 도착, 자신이 받은 수십억원의 돈이 모두 정치자금이었기에 지금도 당당하며 왜 이자리에 서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에대해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방편으로 정치논리를 끌어댈 수는 있어도 법정에서는 법의 논리만이 통용된다”며 “결국 자신들이 법의 지배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 수사학(修辭學)일 따름”이라고 일축했다. 정치인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다른 부장판사는 “정치인을 다른 피고인들과 같은 조건으로 대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국민의 대표로서 헌법상 부여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국회의원을 재판에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구인하기엔 부담이 만만찮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지부진했던 정치인들의 재판이 법원과 여론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기일진행만은 제자리를 잡고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정치인들도 더이상 사법부의 판단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정치인들을 법정으로 내몬 것이다. 국회의원 자신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두려워하는 정치문화가 정착될때까지 지속적인 국민적 감시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손석민·사회부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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