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꿈을 먹고 사는 마지막 챔프

08/31(화) 15:08

“프로레슬링은 절대 쇼가 아닙니다. 경기 규칙을 잘 모르는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세계레슬링연맹(GWF·Global Wrestling Federation) 헤비급 세계챔피언 이왕표(한국프로레슬링연맹대표). 올드 팬들의 추억속에만 아련히 남아있는 그는 국내 프로레슬링의 실낱같은 명맥을 이어가는 유일한 세계 챔프다. 40대중반의 나이에 수입도 변변치 않지만 그저 프로레슬링이 좋아 이길로 들어선 이후 한차례도 후회한 적이 없다. 다만 프로레슬링이 쇼라느니 너무 폭력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기술이나 승부에 조작이란 없다”

“예를 들어 목 비틀기 기술을 걸때 이것을 90도 이상 꺾으면 뼈가 부러져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은 반칙입니다. 따라서 기술을 가하더라도 적절한 수준에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레슬링 규칙입니다. 이것이 쇼로 오해받는 이유입니다. 기술이나 승부에는 조작이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국민들도 바로 이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 출신으로 어릴때부터 유난히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로 지금까지 싸워서 한번도 져 본 적이 없을 만큼 타고난 강골이다. 젊은 시절 명동에서 청년 5명이 탄 피아트 승용차가 앞을 막고 있자 뒷범퍼를 들어 차를 옮기기도 했고 지금도 웬만한 사람 둘은 양 어깨에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좋다. 정확한 나이는 “직업상 밝힐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그는 190㎝,120㎏의 거구에도 군살 하나 없을 만큼 다부지다.

그가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든 것은 1975년. 당시 일간스포츠에 ‘김일도장, 1기생 모집’ 광고를 보고 테스트에 응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는 프로레슬링이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시기. 전국에서 힘깨나 쓴다는 한량 100여명이 테스트를 받아 이중 8명이 1기생으로 선발됐다. 동기생으로는 김일의 막내 동생으로 지금은 작고한 김광식을 비롯해 임대수 양승희 등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워낙 혹독한 훈련으로 이틀 뒤 선발 인원의 절반인 4명이 야반 도주했다. 당시 훈련방식은 훈련생 1명이 선배 10여명과 돌아가면서 싱글매치를 붙는 것. 그러나 애송이인 자신이 선배들을 당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아 매번 “살려달라”고 애걸하기 일쑤였다고 실토한다.

그도 한때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 70년대말 훈련이 너무 고된데다 ‘쉽게 큰 돈을 벌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명동 술집에서 1년간 영업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김유식사범의 권유로 검은 세계와 손을 끊고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옛 인기 되살리고 링 떠나겠다”

그는 프로레슬링 입문 10년만인 85년 김광식선수와 한조를 이뤄 처음으로 태그매치 동양챔피언을 차지했다. 그리고 89년 헤비급 동양 싱글챔피언에 오르며 김일을 이을 수제자로서의 입지를 착실히 굳혀 나갔다. 닉네임이 ‘쟈가 스페셜’인 그의 장기는 발치기와 파워 킥. 웬만한 거구도 태권도6단, 합기도 8단인 그에게 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는 드디어 93년 전 WWF 태그매치 챔피언이었던 브라더 쇼를 꺾고 GWF 헤비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리고 연간 3~4회 방어전을 치러 현재 24차 방어전까지 마친 상태다.

세계챔피언이라지만 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스링의 위치만큼이나 그의 생활도 초라하다. 수입은 대회에서 나온 수익금과 정치·재계 지인들이 제공하는 후원금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따금 TV나 영화에서 파트타임으로 나가 버는 돈으로 연맹을 꾸려간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세계챔피언이지만 그래도 천직인 레슬링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다.

“제가 한창 때였던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지방을 가도 얼굴을 알아봐 융숭한 대접을 받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수들과 다니면 ‘조직폭력배 아니냐’는 눈총만 받습니다. 프로레슬링의 옛 인기를 다시 한번 누리고 링을 떠나고 싶습니다”

송영웅·주간한국부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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