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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놔라 배놔라" 국회가 시달린다

국회가 집단이기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회와 여야 당사 앞에선 하루에도 몇차례씩 각종 노조 등 이익단체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표를 의식한 국회의원들은 이들의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총선은 다가오는데 표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자니 부담스럽고….” 익명을 요구한 한 국회의원의 고백은 이익집단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국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익단체들의 활동은 의원들을 집요하게 설득해 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안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서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방해하거나 협박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206회 임시국회, 로비·저항으로 얼룩

특히 13일 폐회한 재206회 임시국회는 주요법안 처리을 놓고 각종 이익단체들이 로비와 저항에 나서는 바람에 각종 개혁법안이 크게 훼손된채 통과되거나 아예 처리를 미루는 사태가 속출했다.

12일 밤 농업인협동조합법을 심의하던 농림해양수산위에서 발생한 신구범 축협회장의 할복은 이익단체들의 치열한 로비양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 축협은 지난 3월 농·축·인삼업협동조합 통합을 내용으로 하는 농업인협동조합법이 국회에 제출된 이래 법안통과를 집요하게 반대해왔다.

특히 심의전날 야당인 한나라당 소속 몇몇 의원들에게 “법안을 통과시킬 경우 가만 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박전화가 조직적으로 걸려오는 바람에 의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심의당일에도 농림해양수산위 회의실 앞으로 축협간부 50여명이 몰려와 심의도중 회의장을 오가는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붙잡고 통과의 부당성을 호소하는등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날 낮에도 장애인직업재활법 처리를 놓고 서로 이해가 엇갈리는 장애인 단체들이 관련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벌이느라 의원들은 양측의 눈치보기를 해야만 했다.

한국장애인단체 총연맹 회원 2,000여명은 이날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 앞으로 몰려와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목한 12대 개혁법안중 하나인 장애인직업재활법을 빨리 통과시켜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사항. 이들은 이어 국회앞 도로를 한동안 점거하고 대표자 20여명이 법안제출자인 이성재의원의 사무실로 몰려가 오후 내내 농성을 벌였다. 반면 한국지체장애인협회측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직업재활법 통과에 찬성하면 총선때 표를 절대 안찍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법안은 장애인복지와 고용문제를 복지부에서 총괄하고 2,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가진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노동부에서 복지부로 이관하는 것이 골자. 이의원이 지난해 12월 법안을 제출했지만 한국지체장애인협회측은 이에 반대하는 노동부측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총선때 표 안찍겠다” 압력

농산물 유통 가격안정법을 무산시키기 위한 이익단체의 로비도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경매거래만 허용된 현행 대규모 농산물 시장에 농민들이 농산물을 직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도매상 제도’를 도입하는 이 법안에 대해 경매수수료를 챙겨온 도매법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도매법인협회를 중심으로 의원들에게 ‘거래거부’등을 주장하면서 법안폐기를 요구했고, 결국 농림해양수산위 법안심사소위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등 ‘힘있는 시장’들을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방송사들의 로비가 극심했던 통합방송법안은 상임위 통과가 결국 좌절됐고, 교육개혁의 상징인 3대교육법안도 핵심조항이 모두 삭제된채 본회의를 통과해 시민단체들이 로비의혹 국회의원들의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히는등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경영민주화와 소비자보호를 위한 핵심장치인 증권관련 집단소송에 관한 법률과 제조물책임법도 업계의 강력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정기국회로 미뤄졌다. 이에앞서 학원총연합회는 지난달 중순 초등학교 교과목의 학원교습 허용 등을 담은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출하도록 한 뒤 법안에 반대한 국민회의 설훈의원의 지구당 사무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속기록 공개 등 투명한 국회운영 선행돼야

국회 관계자는 “이익집단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법안에 반영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이를 조정하는 것이 정치”라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집단이기주의와 실력행사는 위험수위에 다다른 느낌”이라고 우려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교수는 “우리 사회가 급격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조정의 기능을 갖추지 못해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자리잡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법안심사소위의 비공개 운영등 불투명하게 운영되는 입법과정과 이익단체의 음성적 로비가 힘을 발휘하는 등 국회 스스로의 잘못된 관행도 이같은 국회경시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따라 민주사회에서 당연한 이익단체들의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되 의원들의 자유로운 입법활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장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국회 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속기록 공개 등으로 모든 입법과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천호·정치부 기자 tot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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