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또 다른 고통과 고독

08/10(화) 15:34

YS, 김영삼 전대통령을 흔히들 ‘감(感)의 정치인’이라고 한다. ‘감’이란 감정이요, 감각이며 이성적이거나 분별력과는 좀 거리가 있다.

94년 6월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카터 전 미대통령은 YS를 방문, 남북정상회담이 8월에 성사될 것임을 알렸다. YS는 김주석의 건강상태를 물었다. “원기 왕성하고 활력있습디다”고 카터는 말했다.

카터가 큰 웃음을 짓고 청와대를 떠나자 YS는 조용히 뇌까렸다고 한다. “카터는 사람은 좋지만 노인들에 대해서는 무얼 모르고 있구만.”

YS는 김주석보다 두살 위인 아버지에게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는 효자다. YS는 정보기관이 제공한 김일성의 TV출연 장면을 보면서 건강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YS의 탁월한 ‘감’은 결국 3주후 김주석의 죽음을 예견한 꼴이 됐다.

그러나 YS의 ‘감’은 감각적이요, 감정적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안보보좌관의 3주~3개월내 북한붕괴, ‘북한은 엔진꺼진 비행기’발언은 ‘감’에도 못미쳤다.

더욱 지난 7월21일 정계복귀발언후 부산·경남 유권자 여론조사(조선일보)에서 ‘YS의 정치감각’은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516명 전화조사에서 ▲YS 정치복귀반대, 72% ▲YS신당 안찍겠다, 41% ▲지역감정 조장행위, 51% ▲나라망친 대통령, 63% ▲나라 망친 대통령은 아니다, 32%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 까. 이야기를 우리의 헌정사보다 미국의 대통령역사에서 찾아본다. 미국 대통령 연구학자 10명은 20세기에 미국 대통령을 지낸 17명중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두번째로 꼽았다. 미국에서는 ‘황소대통령’, ‘가장 강력한 정부를 만든 대통령’, ‘가정 활동적인 대통령’, ‘TR’로 불린다.

TR은 러·일 전쟁의 중재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고 미국 해군의 확장, 일본의 한국강점인정, 남미에 미국세력을 확대시킨 제국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런 그가 프랭크린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을 앞세우고 뒷세운 것은 한번의 실수때문이었다.

TR은 1901년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되자 41세로 대통령이 됐다. 3선을 할 수 있었지만 맥킨리의 잔여임기도 1기로 보아 1909년에 대통령직을 포기했다.

대통령직을 51세로 관둔 그는 사냥꾼이었고 박물학자였고 신문의 칼럼니스트였다. 아프리카의 사냥에 그는 1년여를 보냈다. 그의 후임 태프트는 그의 밑에서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공화당이 보스중심의 정파에 의해 후보를 선출하는 것을 대통령이 임명, 선출하는 것으로 변경해 그를 지명했었다.

1910년 6월, 1년여만에 아프리카 사냥에서 돌아오는 그는 마차 14량에 각종 아프리카 동물을 박제해 가득 싣고 왔다. 그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그건 재벌의 단합에 의한 성장을 법으로 막은 그의 결단, 해외진출을 꾀하는 미국의 야심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였다.

그의 후임 태프트는 그보다 더 재벌을 단속하고 해외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 표를 얻지 못했다. TR은 1910년의 열광과 태프트의 무인기에 힘입어 1912년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그러나 공화당 선출대회는 태프트를 지명했다. 그는 진보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서 411만표를 얻어 태프트(348만표)를 눌렀지만 민주당 윌슨(629만표)에게는 졌다. 남긴 것은 공화당의 분열이요, 영광의 개인사에 흠집을 내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선거패배후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쌓은 업적을 축소시키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이번 선거가 꼭 싸워볼만 한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 않은 채 나선 것이 잘못이다. 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거부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요 고독인지 너는 모를 것이다.”

니콜라스 버틀러라는 TR의 친구는 그가 대통령이 되자 말했다. “당신이 백악관을 떠나 전직 대통령이 되었을 때가 대통령 때보다 더 어려운 시기임을 명심하시오.”

YS는 TR의 교훈중 정치재개의 명분이 뚜렷치 않고 옛 지지자들이 반대할 때 고통과 고독이 밀려온다는 사실을 ‘감’잡기 바란다.

박용배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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