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형사책임 없다"

08/25(수) 21:39

수사 당시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외환위기의 형사책임에 대해 법원이 1년2개월여의 심리끝에 무죄판결을 내렸다.

서울지법 형사합의 22부(재판장 이호원부장판사)는 20일 국가공무원법상 직무유기혐의로 기소된 강경식 전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해태 등 기업체에 협조융자를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판단을 내렸지만 형선고는 유예했다.

이번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국가최악의 위기를 불러일으켜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장본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과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검찰이 기소까지 했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책임져야할 정책실패를 직속 부하에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감정적이고 무리한 법적용”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시민단체, 법조계 해석 엇갈려

1심재판부가 내린 판결의 핵심은 “피고인들이 97년 당시 검찰 주장대로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미리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축소·은폐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고의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시민단체의 반응은 물론 법조계내에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경실련 위평량 정책부실장은 “우리나라에는 잘못만 있고 책임은 없다”며 사법부의 판단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최대열 홍보국장도 “단순한 실정법적 판단만으로 무죄를 선고한 것은 국민정서와 법감정에 비쳐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고위관료의 무사안일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한 이같은 위기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고 말했다.

검찰도 즉각 항소의사를 밝히고 있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직무유기의 고의성이 없었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법해석이 아닌가 싶다”며 “정책책임자가 외환위기를 사전에 감지하고도 늑장보고하고 적극 대처하지 않았는데도 고의성이 없단 말이냐”고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내에서도 무죄판결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서울지검의 한 중견검사는 “법원이 정말로 제대로 판결을 했다”면서 “이번 환란사건은 정치에 휘말려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한 사례로서 당초부터 무리한 기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법원 주변에서는 “당장의 정치적 요구와 여론의 압력에서 벗어나 순수히 법과 증거에 따라 내린 판결로 법원의 독립성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판결 뒤집힐 가능성 희박

환란의 형사책임유무는 대법원의 판단까지 받아야 하겠지만 법조계 주변에서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한 법논리상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편 이번 재판은 사안의 중대성에 걸맞게 각종 진기록을 남겼다. 지난해 7월10일부터 장장 407일간 계속된 재판은 공판횟수로는 12·12, 5·18사건의 28회보다 한차례 적지만 출석증인은 모두 50명으로 169일간 41명의 증인이 나왔던 12·12, 5·18 공판기록을 앞질렀다.

증인들의 면면을 보면 피고인들을 제외하고도 홍재형, 임창열 전 부총리와 이경식전 한은 총재, 윤진식 전 청와대 비서관, 윤증현 전 재경원 금융정책실장, 정규영 전 한은 국제부장 등이 핵심증인으로 증언대에 섰다. 또 박건배 해태회장, 김선홍 전 기아회장, 이계철 한국통신사장, 정지태 전 상업은행장, 송기태 전 조흥은행장, 신복영 서울은행장, 이수휴 전 은감원장 등도 법정에 섰다. 김광일, 김용태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최광 전 복지부장관, 이효계 전 농림부 장관도 출두하는 등 우리나라 정·재·금융계 최고인사들이 총망라됐다.

재판기록은 12·12, 5·18사건의 18만여쪽에 비하면 적지만 수사기록 24권, 공판기록 9권을 합쳐 총 4만여쪽에 이르는 분량이고 변호인측 최후 변론 요지서만도 188쪽에 달했다.

송용회·주간한국부 기자 songy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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