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여성들, 비밀은 '남편 외조'

08/05(목) 12:40

잘 나가는 아내를 둔 덕분에 집안에서 뒹굴거리는 남편이 되는 것도 복이라면 복일까. 직장에서 파김치가 된 채 귀가해 자는둥 마는둥 새벽같이 출근해야 하는 한국과 일본의 셀러리맨들은 한 번 꿈꾸어 볼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최근 ‘능력있는’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대신하는 남편의‘외조(外助)’가 화제다. 아내 덕에 팔자 늘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성공한 아내 뒤에는 헌신적인 남편이 있었다’는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

7월27일 5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케네디 우주센터로 귀환한 미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선장인 미 공군의 에일린 콜린스 대령. 그녀는 이번 비행으로 ‘사상 첫 여성 우주왕복선 선장’이라는 또 하나의 임무도 완수했다.

그녀의 뒤에는 역시 공군 조종사로 88년 결혼한 남편 팻 영스가 있었다. 콜린스가 90년 미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 95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부선장이 될 때까지 영스는 남편이자 동료로서 그녀와 함께 했다.

97년 콜린스가 딸 브리지드 마리에를 낳은 후로는 남편 영스가 엄마의 역할을 대신했다. 업무를 마치면 제트기처럼 부대를 빠져 나와 딸을 돌본 것이다. 우주 비행사로서 고된 훈련을 계속 받아야 하고, 때로는 며칠씩 집을 떠나 있어야만 하는 아내를 위해 ‘대역 주부’를 자임한 셈이다. 27일 콜린스가 컬럼비아호를 몰고 귀환할 때 영스는 3살박이 딸을 데리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착륙 모습을 지켜 보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앨 고어 부통령이 참가한 귀환 축하행사에서는 남편이 딸을 위해 성조기 무늬가 있는 옷을 준비했다.

회사 그만두고 ‘들어앉은’ 남편

7월19일 미국 컴퓨터 회사인 ‘휴렛 팩커드’사장 겸 최고경영자로 영입된 칼리 피오리나(44)의 남편 프랭크(49)는 아내를 위해 직장을 그만 두었다. 23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피오리나와 프랭크는 통신회사 AT&T에서 만나 사내결혼한 사이. 프랭크는 결혼생활 초반부터 아내의 능력을 간파하고 ‘아내키우기’에 나섰으며 수년전부터는 노골적으로 “언젠가 내 아내는 대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피오리나가 ‘루슨트 테크놀로지’사의 사장으로 재직한 지난 16개월 동안 집은 그녀에게 여관이나 다름 없었다. 날짜 수로 따져 9개월 이상을 출장으로 보냈고 휴일에도 회사 전용기를 타고 세계를 날아 다녔다. 그러자 남편은 지난해 부터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에서 내조에 전념했다. 물론 ‘독수공방’한 날이 더 많았겠지만.

코팅 필름 제조업체인 ‘브래디’사의 사장이자 최고경영자인 캐서린 허드슨(52)의 남편 보브(50)도 전업주부로 인생의 행로를 튼 케이스. 보브는 93년 아내와 함께 ‘이스트만 코닥’사를 그만 두면서 여섯살난 아들 로버트를 키우기 위해 집안에 들어 앉았다. 아들 양육, 쇼핑, 청소, 세탁은 당연히 보브의 몫.

자녀 교육문제로 거취를 고민하는 아내를 위해 짐을 짊어진 경우도 있다. ‘하니웰’사의 부사장인 프란세스 에머슨의 남편 존은 아내가 96년 당시 부사장으로 승진해 미니애폴리스로 임지를 옮길 때 회사에 사표를 냈다. 계속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남아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살피기로 작정한 것이다.

남편 내조가 아내 능력 극대화

이러한 부부의 역할 전위(轉位)는 한국적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상식밖으로 비칠 수도 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비관용적인 태도와 전통적인 남편사회의 자존심이 경직된 의식구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는 ‘안방마님이 된 남편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남편의 내조가 아내의 뛰어난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뒷받침 해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게 된다는 논리다.

2001이면 퇴임할 클린턴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여사가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할 경우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외도행각을 속죄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밉지는 않은 모습이다. 96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에 고배를 마셨던 보브 돌 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도 요즘 부인 엘리자베스 돌 여사의 예비선거 운동에 바쁘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뛰고 있는 아내를 위해 참모이자 고문으로 전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의 남편 데니스 대처 경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부군 필립 공. 두사람은 처지가 처지인 만큼 나설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데니스 대처 경은 아내가 12년간 권력의 정점에서 ‘대처리즘’의 신화를 창조하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 한번도 아내에게 누가 된 적이 없었다. 필립 공도 1947년 결혼한 이후로 말도 많고 스캔들도 많은 영국왕실에서 어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칭송받고 있다.

필립 공은 여왕의 우산속에 가려 있었지만 환경, 아동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여 왔고 81년부터는 세계야생동물기금 회장으로 조용히 일하고 있다. 올해 4월 엘리자베스 여왕부부가 방한했을 때 한 외교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남자 대통령에 비유하자면, 필립 공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조용하게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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