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판 제3의 길인가, 독재인가.

베네수엘라에서 최근 제헌의회라는 초법적 단체가 입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현대적 감각으로는 상상키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판 유신(維新)체제’로 부를 만한 사건인데, 더 놀랄 것은 이같은 일이 국민들의 지지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막대한 석유자원으로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것 같은 나라, 미스 유니버스를 많이 배출해 금발의 미인들이 거리를 활보할 것 같은 나라에서 유신이라니, 세계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과거 우리의 유신에 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있었듯이 베네수엘라식 유신의 주동자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45)대통령이다. 둘은 공히 국민의 삶을 향상하기 위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유신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강화했다. 차이가 있다면 차베스식 유신은 배고픈 자, 가난한 자에 대한 분배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시장경제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좌파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노선을 ‘좌파 무혈혁명’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하지만 헌법도, 대법원도, 의회도 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일까. 국제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과거 우리의 유신이 그랬듯이.

제헌의회

차베스대통령이 이끄는 집권좌파 애국주축연합(PPC)은 7월25일 의회(Congress)가 엄연히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실시한 ‘제헌의회(Assembly)’ 의원 선거에서 전체 의석 131석 중 121석을 얻는 압승을 거뒀다. 선거는 4월 대법원의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강행됐다. ‘한 국가 두 의회’라는 기괴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선거과정은 그런대로 공정했다. 차베스식 독재를 우려한 서방 참관단의 감시활동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단지 47%의 낮은 투표율과 차베스대통령 지지세력인 빈곤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게 눈에 띈다. 제헌의회는 명목상 최고통치기구지만 사실상 차베스의 거수기나 다름없다.

차베스는 5일 첫 소집된 제헌의회에서 부패척결,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새 역사를 창조할 새로운 헌법제정을 제안했다. 새 헌법은 5년 단임인 대통령 임기를 6년 연임으로 바꾸고, 제헌의회가 입법·사법·행정부에 모두 탄핵권을 행사토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에게 삼권의 조정자·영도자의 권위를 부여했던 72년 우리의 유신헌법 처럼 ‘총성없는 쿠데타’다.

삼권 장악

8월들어 본격적으로 헌법개정을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됐다. 제헌의회는 19일 사법부에 대한 긴급비상사태를 선포했다. 4,700여명의 판사 가운데 절반 가량이 부패 등 혐의로 정직조치를 받거나 해임될 처지에 놓였다. 새로 구성한 사법부 개혁위원회에 대법원이 철저히 배제됐다. 세실리아 소사 대법원장은 24일 법원이 제헌의회를 인정한다고 판결하자 “법원은 죽었다”는 말을 남기고 사임했다.

제헌의회의 타깃은 즉각 입법부로 이동했다. 25일 입법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법안 통과권 등 기존 의회의 권한과 기능을 대부분 흡수했다. 기존 의회는 이제 예산을 감독하는 기능만 갖게 됐다. 의회 다수당인 야당 지도자들은 27일 회의 소집을 위해 의사당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과 차베스 지지자들의 힘에 밀렸다. 의원들은 “민주주의도, 헌법도 죽었다”고 개탄했다. 제헌의회는 조만간 야당이 지배하고 있는 의회를 해산하고 내년초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는 ‘의회개혁안‘을 실행에 옮길 예정이다.

엇갈린 평가

제헌의회 지지세력은 빈곤층을 중심으로 한 일반 시민들이다. 세계3위 산유국이면서도 2,300만 인구의 80%가 빈곤에 시달려온 베네수엘라 국민 75% 이상이 차베스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민들은 지난 5년간 마이너스 성장으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고, 지난해 12월 차베스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60만명이 추가로 일자리를 잃었지만 인민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를 ‘메시아’라고 부른다. 국민들은 차베스대통령이 지나치게 군부를 배려한다고 비판비판하지만 군인들을 동원해 도로를 고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서방언론과 야당은 차베스대통령을 ‘자코뱅주의자’라고 혹평하고 있다. 대중주의적 ‘막가파식’ 개혁이 40년동안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의회정치를 해온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토대를 송두리째 허물고있다는 것이다.

사실 차베스대통령은 개혁조치를 단행하면서 자신의 정적을 숙청하고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는 1인 독재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차베스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과거 쿠데타 동지였던 퇴직군인들을 요직에 앉히고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의 처와 형제 등 가족들을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시켜 당선시켰다.

특히 미국의 우려는 상당하다. 미 국무부는 제헌의회가 입법비상사태를 선포한 26일 “의회의 권위를 제한하는 시도”라고 논평했다. 미국은 차베스 노선이 베네수엘라를 ‘제2의 쿠바’로 몰고가 중남미 전체에 불안을 확산시킬까 우려한다. 또 차베스대통령이 평소에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신자유주의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지역에 가장 많은 금융자본을 투자한 미국에게는 달갑지 않다. 특히 베네수엘라로부터 전체 원유 수요량의 20%를 수입하고 있는 미국은 정치상황의 현상 유지를 바란다.

차베스대통령의 대실험이 베네수엘라에 좋은 것이 될지 나쁜 것이 될지 예단하기는 아직 어렵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인들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동준·국제부 기자


주간한국